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영화정보
  •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감상평 1
(제13권 제1호)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오토피아 1998년 겨울
종족(종교)․영토분쟁과 이의 극복방안*1)
송 병 록**1)
Ⅰ. 글을 시작하며
   종족, 부족, 인종 그리고 국가간의 갈등과 전쟁의 고통 속에서 품어온 평화로운 인류공영의 세계공동체의 실현은 동서양의 정치철학에서 공히 찾아볼 수 있는데 동양의 고대중국 정치철학에 나타난 大同思想과 四海同胞思想 그리고 고대 서양의 호모노이아(homonoia)와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 등이 바로 그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류가 다 함께 평화와 번영을 구가할 대동세계를 꿈꾸는 고대적 이상은 그 후로도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머리와 가슴을 사로잡았고 이들에 의해 여러 형태의 사상적, 이론적 발전을 보았다. 서양에서는 󰡔모나르키아󰡕(Monarchia)라는 단테(1265~1321)의 세계정부의 이상이나 칸트(1724~1804)의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 그리고 러셀(1872~1970)의 “정치적 세계공동체” 주장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며, 중국에서는 儒家의 대동사상과 그 뒤 2000년 이상의 세월을 뛰어넘어 공자의 깊은 뜻을 밝히고 사회개혁의 선구자적 의지를 공자에게서 찾으려한 강유위(康有爲: 1858~1927)의 유명한 저서인 󰡔大同書󰡕에서 세계정치공동체의 형태로 구체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수는 약 840만명으로 이보다 약간 많을 뿐이다. 이것은 폭넓은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전사자 수를 가지고 볼 때, 놀랍게도 세계는 1945년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을 다시 한번 치른 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민간인을 포함한 총 사망자 수는 3,300만~4,000만명에 달하는데, 이 역시 부상당하거나 강간당하거나 강제 이주 당하거나 병들거나 빈곤에 빠진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는 수치이다. 오늘날 유엔회원국은 대략 185개국인데 그 중 60개국이 넘는 회원국들이 전쟁을 치렀다. 실제로 1945~90년의 전체 2,340주중에서 지구상에 전쟁이 전혀 없었던 기간은 도합 3주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1945년 이후 지금까지의 기간을 “戰後”시기라고 부르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Toffler 1993: 13~14).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온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한 이러한 사상적, 이론적 성찰과는 달리 오늘날의 인류사회는 갈등으로 인한 분쟁과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인류 역사상 1만5천여회의 대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1945년에 “평화”가 마련된 이후 전세계에 걸쳐 일어난 전쟁과 내전은 계산방법에 따라 150~160회에 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군인 약 720만명이 살육 당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수치에는 부상자, 고문 받거나 불구가 된 사람들을 제외한 사망자만 포함된 것이다. 사망자건 부상자건 이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 피해자 수는 이 통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전체 전사자
   소위 탈냉전 이후에도 세계평화는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 가령 1993년 현재 전 세계에서 모두 약 48건의 민족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옛 소련에서만 164건의 국경선을 둘러싼 영토 민족 갈등이 불거졌으며 이 중 30건은 무력 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Huntington 1996: 35). 노르웨이 국제평화연구소(PRIO) 소장인 댄 스미스는 다가오는 세기의 일차적 갈등요인은 빈곤과 다양한 지역에서의 민족주의 투쟁이 될 것으로 전망하는데, 그의 전망처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인종간, 민족간 투쟁과 종교 및 영토분쟁 역시 지속적으로 세계평화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주로 제3세계국가군에서 일어나는 종교와 종족 갈등으로 피바람이 그칠 날이 없지만,1) 선진국 위주의 국제정치 상황에 가려 세계사의 뒷전에 머물러 있다.
   특히 20세기는 인류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두 번의 세계대전과 200만명 이상의 아사자를 낸 인류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참혹한 전쟁인 비아프라 전쟁이 일어난 시기였으며, 또한 과연 인류에게 양심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되물어보는 계기를 만든 스페인 내전과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시기였다.
   흔히 사람들은 “전쟁의 매력은 정치가 수 십년 동안 풀 수 없는 숙제도 단숨에 해결하는데 있다”고 말을 하거나, “모든 전쟁이 평화를 위한 것이었듯이 모든 평화는 전쟁을 기다리는 순간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영 희망은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인류사회의 분쟁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글은 현 인류사회의 분쟁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적 고찰을 그 목적으로 한 것이다.
세계 각지의 분쟁양상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Ⅱ. 분쟁의 원인과
1. 분쟁의 원인(역사, 인구, 정치)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종족, 민족, 종교, 국가간의 분쟁과 전쟁의 일차적 원인은 역사적 뿌리에 그 기저를 두고 있다. 지난날에 발생한 상이한 “문명”(여기서는 “종교”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집단간의 간헐적인 단층선 전쟁(fault line war)2)이 현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며 이것은 다시 양측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인도대륙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북부 코카서스의 러시아인과 코카서스인, 트랜스코카서스의 아르메니아인과 터키인, 팔레스타인의 아랍인과 유대인, 발칸지역의 카톨릭 교도․이슬람교도․정교도, 발칸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의 러시아인과 터키인, 스리랑카의 신할리즈인과 타밀인, 아프리카의 아랍인과 흑인 등 이들 관계 모두는 오랜 세월 불신에 찬 공존과 적대적 폭력 사이를 오갔다.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할 만한 분쟁의 역사적 유산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관계들에서 역사는 생생히 살아 숨쉬면서 공포를 자아내고 있다.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살육의 역사는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왜 20세기말에 와서 폭력이 다시 분출되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세르비아인(정교), 크로아티아인(카톨릭), 이슬람교도는 수 십년 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 아주 평화로운 공존관계를 누렸다. 인도에서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도 그 동안 별다른 마찰 없이 지냈다. 소련의 수많은 민족 집단과 종교 집단도 소련 정부의 강압이 야기한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순탄한 공존을 누렸다. 타밀인과 신할리즈인도 종종 열대의 낙원으로 묘사되는 스리랑카에서 조용히 어울려 살았다. 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는 역사의 격랑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따라서 역사 그 자체만으로는 평화의 붕괴를 설명하지 못한다.
   20세기의 지난 몇 십년 동안 다른 요인들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이 없는데, 인구 구성의 변화가 그런 요인들 중의 하나다. 한 집단의 수적 팽창은 다른 집단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압력을 가하여 반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집단의 인구 팽창이 인구 증가율이 미미한 집단들에게 군사적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초반 레바논에서 30년 동안 유지되어온 헌정질서가 무너진 것은 마론파 크리스트교도에 비해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수가 급격히 불어난 데서 주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풀러(Gary Fuller)의 지적에 따르면 스리랑카에서 1970년대 초 신할리즈 민족주의 세력의 폭동과 1980년대 말 타밀 반군의 항거가 절정에 이른 시점은 이 두 집단에서 15세에서 24세까지의 ‘청년층’이 총인구의 20%를 넘어섰던 기간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인과 남부 이슬람교도 사이의 단층선 전쟁도 인구 증가율의 현격한 차이에서 촉발되었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 연방의 여성 출산율은 1인당 1.5명인데 비해 이슬람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중앙아시아의 여성 출산율은 약 4.4명에 달하였으며, 순수 인구증가율(총출생률에서 총사망률을 뺀 수치)은 1980년대 말 중앙아시아 지역이 러시아의 5배 내지 6배에 이르렀다. 1980년대의 체첸 인구는 26% 늘어 러시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가 되었다. 체첸의 높은 출산율은 수많은 이민과 전투원을 낳았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의 높은 출산율과 카슈미르 지역으로 유입된 파키스탄 이민 인구는 인도의 통치에 저항하는 새로운 움직임을 낳았다(Hunt-ington 1996: 259~260).
“예루살렘”으로 보았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1389년 6월 28일 오스만 제국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곳이다.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세르비아는 500년 가까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문명간 전쟁으로 귀결된 복잡한 과정들에는 다양한 원인과 발단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이 분쟁을 낳은 가장 중요한 단일 요인은 코소보에서 발생한 인구 구성의 변화였다. 코소보는 세르비아 공화국 내의 자치주로서 분리 독립권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유고슬라비아의 6개 공화국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1961년 코소보의 인구는 알바니아 이슬람교도가 67%, 세르비아 정교도가 24%였다. 알바니아계의 출생률은 유럽 최고 수준이어서 코소보는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면 알바니아계 인구 중에서 약 50%가 스무살 미만이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등지고 경제적 기회를 찾아 베오그라드 등지로 떠났다. 그 결과 코소보 인구의 인구 분포는 1991년에는 이슬람교도가 90%, 세르비아계가 1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르비아인은 코소보를 자신들의 “성지” 혹은
   1980년대 말 인구 구성에 급격한 변화가 오자 알바니아계는 코소보를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의 지위로 격상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세르비아계와 연방정부는 코소보가 일단 분리 독립권을 획득하면 분리하여 알바니아와 합병하는 길을 추구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그러한 요청을 거부하였다. 1981년 3월 공화국으로의 승격을 요구하면서 알바니아계가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세르비아계에 따르면, 세르비아인에 대한 차별, 박해, 폭력이 그 후 눈에 띄게 늘었다. 이 모든 것이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였고 밀로세비치(Slobodan Milosevic)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1987년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가 대거 운집한 가운데 우리의 땅과 역사를 지키자는 연설을 하였다. 즉각 공산주의자, 비공산주의자, 심지어는 반공주의자를 포함한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코소보에 거주하는 소수 세르비아계를 보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알바니아계를 탄압하여 2등 국민으로 강등시키려는 결의를 다졌다. 밀로세비치는 이내 민족지도자로 떠올랐다. 2년 뒤인 1989년 6월28일 밀로세비치는 계속되는 이슬람교도와의 전쟁을 상징하는 위대한 전투 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백만 명에서 2백만 명의 세르비아인을 거느리고 코소보로 돌아왔다.
   알바니아계의 인구 증가와 세력 확대에 직면한 세르비아인들의 공포와 민족주의는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인구 구성의 변화로 말미암아 한층 고조되었다. 1961년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인구의 43%를, 이슬람교도가 26%를 차지하였다. 1991년에 와서는 이 비율이 거의 정반대로 역전되어 세르비아계가 31%로 떨어진 반면 이슬람교도는 44%로 껑충 뛰었다. 같은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계도 22%에서 17%로 줄었다. 한 집단의 인구 팽창은 다른 집단에 의한 민족 청소로 이어졌다.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문명간 충돌의 상당수는 인구 균형의 변화와 청년층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문명간 충돌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충돌은 인구 요인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역사적 요인도 부분적 역할밖에는 못한다. 크로아티아가 2차 대전 당시 세르비아인을 학살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민족은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도, 다른 지역에서도 정치는 분쟁의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일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의 붕괴는 새롭게 대두한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민족간, 문명간 분쟁을 자극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제국주의의 종식은 이와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체제가 무너지자 역시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소련 국민으로, 유고슬라비아 국민으로 정의할 수 없었으므로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열망이 간절해졌다. 사람들은 그러한 정체성을 “민족”과 “종교”라는 해묵은 대용물에서 발견하였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물론적 명제를 금과옥조로 받든 국가들의 억압이었지만 평화로웠던 질서는 다양한 신들을 떠받드는 민족들의 폭력으로 바뀌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중앙권력을 장악하고자 각축을 벌였을 것이고 유권자들의 표를 끌어 모으고자 다민족적, 다문명적 호소력을 갖는 공약을 내세웠을 것이다. 그 결과 의회내의 연정과 비슷한 정치적 공존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에서 모두 먼저 공화국 단위의 선거가 실시되어 정치 지도자들은 중앙에 맞서는 선거 구호를 내세우고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공화국의 독립을 요구하고픈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보스니아의 1990년 선거에서도 유권자들은 정확히 민족의 경계선을 따라 투표하였다. 다민족주의를 표방한 개혁당과 옛 공산당은 각각 10% 미만의 지지를 얻었다. 이슬람교도의 민주행동당(34%), 세르비아계의 민주당(30%), 크로아티아계의 민주연합(18%)이 얻은 표는 이슬람교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의 인구비와 대체로 합치하였다. 옛 소련과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거의 모든 공화국에서 최초로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에서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하고 다른 민족 집단과 맞서 자신들의 민족성을 수호하기 위한 엄격한 대응책을 약속한 정치 지도자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선거 유세전은 민족주의 구호를 확산시켜 단층선 분쟁을 단층선 전쟁으로 증폭시킨다. 데니치(Bogdan Denitch)의 표현대로 민족주의가 민주화로 이행할 때 그 최초의 결과는 “논전” 아니면 “전쟁”이다(Huntington 1996: 260~262).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이 과정은 새로 등장한 정치 집단들이 민주주의의 절차를 채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한층 악화되었다.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분열되기 시작하였을 때 권력을 잡고 있던 엘리트들은 국민투표를 시행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국민투표를 시행하였더라면
2. 세계 각지의 분쟁양상
1) 유럽과 구소련
   체첸공화국, 타지키스탄, 북아일랜드 및 키프로스 등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1979년부터 소련은 그리고 이어서 러시아는 남부지역의 이슬람교도들과 세 차례의 대규모 단층선 전쟁을 벌였다. 그것은 1979~89년 아프카니스탄 전쟁, 그 연장선에서 1992년 시작된 타지키스탄 전쟁, 1994년에 발발한 체첸 전쟁이다.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체첸반군은 1996년 1월 인근 다게스탄공화국의 한 병원을 점거, 민간인 1천여명을 인질로 억류했다. 또 체첸반군은 그해 3월 수도 그로즈니를 기습, 러시아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에 맞서 러시아군은 7월 반군거점을 맹폭, 3백30여명을 숨지게 했다. 이후 양측은 협상에 나서 21개월간 10만여명의 희생자를 낸 이 내전을 마감하는 공식 휴전합의를 1996년 8월에 발표했다. 이 평화협정에 따라 체첸 독립문제는 향후 5년간 유예됐으나, 체첸의 분리독립과 이 지역에서의 러시아의 지배권 확보 및 영향력 유지 그리고 체첸과 러시아 사이의 뿌리깊은 역사적 갈등과 반목 때문에 언제든지 이 지역에서는 분쟁이 재연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포함된 반정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타지키스탄에서도 싸움을 벌이고 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해온 아일랜드공화군(IRA)이 폭탄테러와 휴전을 반복하면서 지난 27년 동안 1만여건의 폭탄테러가 발생, 3천명 이상이 사망하고 3만 9천여명이 다쳤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수상은 1997년에 영국과 북아일랜드사이에 평화협정을 성사시켰으나, 이 양자 사이의 평화유지란 단지 폭풍전의 고요에 불과한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3대 종교인 로마 카톨릭, 동방 정교,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전쟁으로서의 특성을 띄게 되었고 제국들의 경계선이 맞부딪쳐 그 종교적 파편이 쌓이게 된 곳이 보스니아이다(Hunt-ington 1996: 271). 1995년 12월의 데이턴 평화협정으로 3년반 동안 계속된 내전이 끝난 보스니아에서는 1996년 3월 총선이 실시돼 3인의 대통령단이 선출되었으나, 워낙 인종 및 종교간 갈등의 골이 깊어 언제든 분쟁이 재연될 소지가 높은 편이다. 한편 98년 들어 다시 불거지기 시작한 코소보 사태는 이 지역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갈등으로 지금까지 2천여명이 숨지고 27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98년 초 신유고연방의 세르비아 경찰이 코소보 독립을 주장하는 알바니아계 게릴라와의 교전에서 일부 주민을 학살하고 주민들이 경찰을 공격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게 됐다. 현재 유럽안보협력회의(OSCE) 소속 감시단 2천명이 코소보에 파견되고 유고측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선에서 그런 대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다(중앙일보, 99.1.4). 옛 유고지역은 인종적 반목과 종교적 갈등이 그 밑바닥에 진하게 깔려있어 언제든지 분쟁이 재연될 소지을 안고 있다.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2) 아프리카
   유럽열강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종족간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아프리카는 향후에도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주요 지역이 될 것이다. 아프리카의 세 번째 대국 자이르에서 32년간 장기집권을 해온 모부투정권의 종말을 가져온 직접적 계기도 종족갈등이었다. 자이르정부가 1996년 10월 자이르 동부지역에 대대로 거주해온 30여만명의 투치족에 대해 자이르를 떠날 것을 지시하자 분개한 투치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결국 모부투정권을 붕괴시키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반란으로 인하여 후투족난민 1백만명이 실종됐으며 그해 11월 난민 역사상 최단기간에 가장 많은 50만명의 인구가 이동한 엑서더스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 투치족의 반란은 투치족이 정권을 잡고있는 르완다, 우간다, 부룬디 등 주변국들이 자이르반군을 지원함으로서 인접국들까지 이 반란에 개입하게 되었다. 1997년 5월 이 투치족반란의 지도자인 로랑 카빌라는 모부투의 정권을 붕괴시켰지만, 카빌라 대통령의 집권을 도왔던 투치족이 98년 8월 카빌라정권의 홀대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카빌라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앙골라, 짐바브웨, 나미비아, 잠비아 등 4개국이 군대를 파견하고 투치족을 후원하는 르완다, 부룬디 등도 개입함으로써 콩고민주공화국(자이르의 새 국명) 내전은 국제전으로 비화했는데 이는 카빌라 정권하의 콩고민주공화국의 앞날 또한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동아일보, 98.12.28). 한편 자이르 반란사태의 한 축인 우간다에서는 우간다의 반군세력이 수단과 자이르에 자리잡고 있어 두 종족간의 전쟁위험이 잠복되어 있는 실정이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역사적으로 이슬람계 민족들을 억압해 온 암하라 정교도들이 오로모 이슬람교도들의 반란에 직면해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교를 믿는 북부의 아랍계와 크리스트 정령 신앙을 가진 남부의 흑인들 사이에 다양한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의 가장 치열한 싸움은 수단에서 일어났다(Huntington 1996: 256). 수단은 지난 83년부터 발생한 아랍계 정부군과 우간다의 지원을 받고 있는 기독교계 흑인반군간에 내전이 계속되고 있으며, 소말리아와 라이베리아에서는 군벌간 세력다툼이 계속되고 있다. 알제리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저항세력과 정부군과의 교전이 7년째 계속되면서 6만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있다. 1992년 이슬람 구국전선(FIS)의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군부가 총선을 무효화시키자, 이슬람무장세력(GIA) 등 과격분자들은 군부의 지원을 받는 현 정권의 타도를 외치며 총을 들었다. 알제리정부는 96년 11월 개헌투표로 이슬람교정당을 불법화시키고 97년 6월의 총선 참여를 원천봉쇄함으로써 이슬람 근본주의세력의 무차별적인 테러를 야기시키고 있는데 외국인들은 물론 내국인들조차 마구잡이로 희생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28%에 이르는 실업률과 30세 미만 인구중 3분의 2 이상이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불만스런 현실도 반군의 반정부활동을 부추기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북부의 이슬람교도 세력과 남부의 크리스트교 부족들의 대립으로 그 동안 수 차례의 쿠데타와 폭동, 한차례의 전면전을 치러야 했다. 차드, 케냐, 탄자니아에서도 엇비슷한 싸움이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 사이에서 벌어졌다(Hunt-ington 1996: 256). 그 외에도 시에라 리온, 앙골라 등지에서도 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3) 아시아
   지난 92년 나지불라정권 몰락후 이슬람파벌간 세력다툼이 벌어진 아프가니스탄은 96년 9월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이슬람 학생 무장조직인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국토의 약 4분의 3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북부로 쫓겨간 구정부군과 군벌 도스툼장군이 反탈레반 공동전선을 구축해 탈레반을 카불 북부에서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후 97년 5월 탈레반이 수도 카불과 국토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탈레반 기치아래 아프가니스탄이 통일되는 듯했으나, 반군연합세력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또다시 유혈사태가 재연되고 있다. 구소련의 침공(1979년)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사태는 정치적 적대세력과 종교적 반목으로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입장이 수시로 바뀌면서 피의 보복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탈레반에 대해 96년 9월 쫓겨난 랍바니 전대통령의 측근 마수드 장군을 중심으로 한 반군연합세력이 수도 카불 외곽까지 진격,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피란행렬이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까지 이어졌다. 92년 무자헤딘의 이슬람혁명 이후 계속된 내전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선 7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가까운 장래에 아프가니스탄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스리랑카에서는 인종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다수파인 신할리족이 정부와 군을 장악하고 있는데 대해 스리랑카 총인구(1천8백만명)의 18%를 차지하는 타밀족이 지난 83년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라는 게릴라조직을 만들어 분리독립을 추구하면서 피의 보복이 계속되고 있다. 힌두교 계열의 타밀 반군과 불교 계열의 신할리즈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인도 정부는 반군에게 막대한 지원을 제공하여 남부 인도에서 타밀 반군을 훈련시키고 무기와 자금을 보냈다. 1987년 스리랑카 정부군이 타밀 반군을 거의 진압할 단계에 이르자 이 대량 학살극을 규탄하는 인도 국민의 여론이 들끓었고 인도 정부는 타밀 진영에 식량을 공수하면서, 자예와르데네 대통령에게 타밀 호랑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인도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뒤 인도와 스리랑카 정부는 스리랑카가 타밀 지역에 상당 수준의 자치를 허용하는 대신 반군이 인도군에게 무기를 반환한다는데 합의를 하였다. 인도는 합의 내용에 따라 5만명의 병력을 스리랑카에 보냈지만 타밀 호랑이들은 무기 반환을 거부하였고 인도 정부는 한때 자신이 지원한 게릴라들과 교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인도군은 1988년초 스리랑카에서 철수하였지만, 인도 정부는 남부 인도에 거주하는 5천만 타밀인들이 반군에게 보내는 공감과 지원을 막을 수는 없었다(Huntington 1996: 276). 지난 14년간에 걸친 교전으로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 반군 양측에서 모두 4만8천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섬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모로족 반군의 분리주의 운동이 25년간 계속되고 있다. 경제․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아온 데다 기독교 인구가 지속적으로 이 지역에 유입되자 소외감과 위기의식이 고조된 모로족들이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총을 들었다. 필리핀 정부는 96년 주요반군단체인 모로민족해방전선(MNLF)과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나 MNLF에서 분리된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의 투쟁은 계속되면서 정부군과의 교전을 지속하고 있다.
   한편 인도-파키스탄간 영토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테러가 계속되고 있으며, 동티모르가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마약왕 쿤사와는 화해했지만 카렌반군이 여전한 미얀마 등지에서도 분쟁의 불꽃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도 소수민족들의 독립 움직임이 활발하다. 특히 티베트(西藏)자치구와 신강자치구에서는 분리독립을 위하여 과격한 시위와 폭탄테러를 감행하고 있는데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추종하는 미국의 유명배우 리처드 기어가 불교승려가 될 결심을 밝히면서 중국에서의 티베트의 인권보호와 분리독립을 지지하고 있어 앞으로 티베트 분리독립 문제는 한층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90년대 동아시아에는 해결되지 않는 영토분쟁이 남아 있는데, 그 중 가장 굵직한 것이 일본과 러시아의 북방 4개 도서 반환 문제, 남중국해의 스프라틀리(南沙群島)영유권을 둘러싼 중국, 대만, 베트남, 필리핀,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국가들 사이의 대립, 센카쿠(다오위타이)열도와 독도를 둘러싼 일본과 중국, 일본과 한국의 대립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중국과 인도의 국경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와 한결 누그러지기는 하였지만 중국이 몽골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나설 경우 언제든지 표면으로 부각될 수 있다.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4) 중남미
   중남미에선 페루, 멕시코, 콜롬비아 그리고 과테말라 등에서 정부와 좌익게릴라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선 주로 빈민층문제와 원주민 권리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정부와 게릴라간의 평화협상은 지리멸렬하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96년 12월17일 페루의 좌익게릴라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MRTA)이 일본계 후지모리 대통령의 좌익게릴라에 대한 강경책에 항의해 조직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리마주재 일본대사관저에서 벌인 인질극으로써 결국 좌익게릴라들은 정부군의 기습작전에 의해 전원 사살되었으나 이 사건 이후 정부군과 좌익게릴라간에는 반목의 골이 깊어지게 되었다. 중남미 전역에선 일반적으로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라 칭하는 좌익 무장단체의 반정부활동이 활발한 편인데, 멕시코에서는 농민반군인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전선(ZNFF)이 정부와 평화협상을 시작한 반면, 1996년 6월 좌익 무장조직인 인민혁명군(EPR)이 새로 등장해 반정부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콜롬비아에서는 1996년 정부의 코카나무 소각 결정에 항의, 농민들의 시위와 반군세력들의 공격이 활발하였으며, 과테말라에서는 정부와 토착민 마야족 중심의 게릴라 조직인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이 1996년 12월말 36년간 지속된 내전상태를 끝내기 위한 역사적인 최종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나 여전히 불안한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5) 중동
   중동에서는 유대인이 나라를 세운 이후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이제까지 네 번의 전쟁이 일어났고 팔레스타인 민족은 이스라엘의 통치에 “인티파다”(봉기 또는 반란)로 맞서고 있다. 1995년 11월 온건노선을 걸어온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유태인 과격파에 의해 피살되고, 96년 2월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팔레스타인들의 잇따른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하면서 중동평화협상은 또 다시 난관에 부닥치기 시작했다.
   對아랍 강경파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등장하고 곧 이어 이스라엘군의 헤브론 철수 등 오슬로협정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결국 96년 9월초 이스라엘측이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이슬람 사원 옆을 관통하는 새 출입구를 개통한 것을 둘러싸고 양측은 최악의 무력충돌을 빚었고 이 과정에서 74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96년 12월 들어서는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문제로 양측이 충돌직전까지 갔으나 미국의 중재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이스라엘내각은 중동평화협상에서 주요사안의 하나인 요르단강 서안지역을 “국익에 필수적”이라 하여 결코 팔레스타인에 양보하지 않기로 결정(98.1.14)하였으나,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98년 10월 23일 미국 워싱턴 근교 와이밀스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평화와 영토의 교환”으로 평가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팔레스타인 헌장의 반(反)이스라엘 조항을 삭제했으나 이스라엘은 강경파들의 반발로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서의 철군은 이뤄지지 않았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 평화협정안에 대한 의회의 지지를 얻지 못해 불신임 당했으며 이스라엘은 99년 초에 조기총선을 치르기로 하였다(동아일보, 98.12.28).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은 언제든지 분쟁이 재연될 소지를 안고 있으며 이 지역의 분쟁은 또 다른 중동전쟁을 야기할 수 있는데 이는 결국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레바논에서는 마론파 크리스트교도들이 시아파를 비롯한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승산없는 싸움을 벌리고 있다. 한편 최근에는 터키와 이라크 북부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이 지역에선 테러활동과 소탕작전이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중동의 집시”로 불리는 쿠르드족은 단일민족국가 건설 요건을 갖추었으면서도 나라가 없는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이다. 인구 2천만명에 고유언어를 사용하며 4천년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쿠르드족은 터키동부(1천2백만명), 이란(5백50만명), 이라크북부(3백50만명),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 5개국에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인접국가들과 끊임없는 무장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터키 등 주변국들과 국제사회가 이들의 독립을 원하지 않는 데다 쿠르드족 내부도 해당 국가별로 세력이 갈려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친 이라크계인 쿠르드 민주당(KDP)과 친이란계인 쿠르드 애국동맹(PUK)의 양대세력이 있고 터키에 근거지를 둔 쿠르드 노동자당(PKK) 등의 정치조직이 있다. 특히 터키에는 터키 인구의 25%인 1천2백만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터키 정부는 그들의 고유 언어와 의상을 금지하고 반군기지를 습격하는 등 이들을 철저하게 탄압해 오고 있다. 쿠르드족은 78년 쿠르드 노동자당을 창당한 지도자 오잘란을 중심으로 84년부터 독립투쟁을 본격화하고 있다. 많은 중동전문가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강경입장이 계속되고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이 지속되는 한 중동지역에서의 평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야기한 걸프전쟁은 미국과 이라크간의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 양상을 낳았고, 그 후로도 양측간의 군사적 대결 양상은 지속되어 왔는데 이라크에 대한 유엔의 무기사찰 거부를 이유로 미국과 영국군이 98년 12월 16일부터 나흘간 이라크를 공습했다. “사막의 여우”란 작전을 통해 양국군은 크루즈 미사일과 전폭기를 동원, 이라크 전역의 군사시설을 공격했으나 당초 목표인 생화학무기시설을 제거하지 못했고 후세인 대통령에게 타격을 주는 데도 실패했다. 이라크 공습은 러시아, 중국, 프랑스의 반대에 부닥쳐 국제사회의 분열조짐을 낳았고 사찰제도의 개선 필요성이 제기됐다(동아일보, 98.12. 28).
향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미 국방성에 따르면 1980년부터 1995년까지 15년 동안 미국은 중동에서 모두 17회의 군사작전을 벌였는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이슬람교도를 겨냥한 작전이었다. 미국의 군사작전이 그처럼 집요하고 일관되게 다른 문명 사람들에게 적용된 예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는 헌팅턴의 지적처럼(Huntington 1996: 217) 중동에서의 미국과 아랍 이슬람 세력과의 군사적 대결 양상은
   거(Ted Robert Gurr)의 심층 분석에 따르면 1993~94년에 진행되었던 50건의 민족 분쟁 가운데 26건에 이슬람교도가 연루되어 있다(<표 1> 참조).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 사이의 분쟁은 모두 20건이었는데 이 중 15건이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의 분쟁이었다. 요컨대 이슬람 문명이 연루된 분쟁이 모든 비이슬람교 문명간 분쟁의 3배에 달하였다는 것이다. 이슬람 문명 내부의 분쟁 또한 아프리카의 부족 분쟁을 포함하여 그 어떤 문명의 내부 분쟁보다도 많았다. 이슬람과는 대조적으로 서구는 2건의 문명간 분쟁과 2건의 문명 내 분쟁에 연루되었다. 이슬람교도가 연루된 분쟁은 희생자를 많이 내는 경향이 있다. 20만명 이상이 죽었다고 거(Gurr)가 추정하는 여섯 전쟁 가운데 셋(수단, 보스니아, 동티모르)이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의 분쟁이었고, 둘(소말리아, 이라크-쿠르드)이 이슬람교도간 분쟁이고 겨우 하나(앙골라)가 비이슬람교도간 분쟁이었다.
<표 1> Ethnopolitical Conflicts, 1993~1994
 
문  명  내
명  간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문 

이  슬  람
11
15
26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기      타
19
 5
24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30
20
50
자료: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Vol. 38, 1994, pp. 347~378; Huntington(1996), p. 257에서 재인용.
현재 약 59건의 민족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58개 지역을 지목하였다. 이 중 절반 지역이 이슬람교도가 다른 이슬람교도나 비이슬람교도와 충돌한 곳이었다. 59개 분쟁 중에서 31개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간의 싸움이었는데 이 문명간 분쟁 가운데 3분의 2가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의 분쟁으로 파악되어 거의 분석치와 엇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뉴욕 타임스󰡕지는 1993년
   또 다른 분석에서 시바르드(Ruth Leger Sivard)는 1992년 현재 진행되고 있는 29건의 전쟁(매년 1천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분쟁으로 정의)을 확인하였는데, 모두 12건의 문명간 분쟁 중에서 9건이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 사이의 분쟁으로 나타나 이슬람교도는 그 어떤 문명 집단보다도 전쟁을 많이 벌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세가지 상이한 자료에서 얻은 결론은 동일하다. 1990년대 초반 이슬람교도들은 비이슬람교도들보다 집단 분쟁에 더 많이 연루되어 있으며 문명간 분쟁의 3분의 2에서 4분의 3이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 사이의 싸움이었다. 이슬람의 경계선은 피에 젖어 있으며, 그 내부 역시 그렇다.
   이슬람교도에게 폭력 분쟁으로 치닫는 성향이 높다는 것은 이슬람 국가들의 군사화 정도에서 엿볼 수 있다. 1980년대에 이슬람 국가들의 “군사력 비율”(military force ratio, 인구 1천명당 군인의 수)과 “군사노력지수”(military effort index)는 다른 문명의 어느 국가보다도 크게 높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크리스트교 국가들의 군사력 비율과 군사노력지수는 다른 문명의 국가들보다도 크게 낮았다. 이슬람 국가들의 평균 군사력 비율과 군사노력지수는 크리스트교 국가들의 약 2배였다.
   이슬람교도는 또한 국제적 위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 폭력에 의존하는 성향이 남달리 높아 1928년부터 1979년까지 그들이 연루된 총 142건의 분쟁 중에서 76건을 폭력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그 중 25건은 폭력이 분쟁을 처리하는 으뜸가는 수단이었으며 51건은 이슬람 국가들이 다른 수단들과 병용하여 폭력을 사용하였다. 이슬람 국가들은 폭력을 구사할 때도 아주 강도 높은 폭력을 동원하여, 폭력이 사용된 분쟁 가운데 전면전 비율이 41%였고 38%는 대규모 충돌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슬람 국가들의 무력 의존도가 53.5%에 이르는 반면 영국은 자신이 연루된 국제 분쟁 중에서 겨우 11.5%, 미국은 17.9%, 소련은 28.5%를 무력으로 해결하였다. 주요 강대국 중에서 오직 중국만이 이슬람 국가를 능가하는 폭력 의존도를 보였다. 중국은 위기의 76.9%를 폭력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이슬람교도의 호전성과 폭력성은 이슬람교도도 비이슬람교도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20세기 후반의 엄연한 사실이다(Huntington 1996: 256~258).
극복방안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Ⅲ. 갈등과 분쟁의
1. 다자안보체제(multi-lateral security system) 구축
   동서간의 냉전체제 와해 이후 세계는 지금 새로운 국제체제와 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협력과 경쟁을 기본 행위규범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질서 하에서 각국은 국가정책에서 군사․안보보다는 경제정책을 그리고 대외관계에서는 이념보다는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는 행동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협력과 경쟁은 서구 선진국들의 질서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 뿐, 후진-개도국에서는 오히려 민족적 개체성을 내세우는데 따라 분열과 갈등이 부각되고 있다. 이는 후진-개도국들은 선진국들의 협력과 경쟁의 자유주의적 행동규범 보다는 여전히 군사력을 문제해결의 주요수단으로 이용하는 현실주의적 행동원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Goldgeier and McFaul 1992: 469~470). 그리하여 세계적 차원의 군사적 대결양상은 해소되었지만 지역적 차원의 군사적 대립과 갈등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며 안보환경의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의 증대로 특히 아시아 각국들의 군비경쟁 또한 가속화되고 있다.
   군사전문가들은 이 지역에 있어서 군사력 경쟁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역내 국가간 이해충돌을 평화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안보협의의 틀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기인한다. 우선 아․태지역 전체는 물론 주변 강대국들 사이의 긴장이 부분적으로나마 해소되어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평화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으며, 여기에다 한반도 통일문제는 한민족 내부의 문제라는 인식이 국제적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어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반대명분이 없다는 사실도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자국의 이익에 별반 기여하지 못하거나 반(反)하는 형태로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주변 국가들은 한민족이 주장하는 분단의 해소라는 명백한 통일명분에도 불구하고 반대입장을 분명히 할 것이고 나아가 통일을 방해 내지는 저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미국은 세계질서를 주도할 만한 확실한 세력으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안정된 국제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다양한 방법들 가운데 “유럽안보협력회의”(CSCE)형 안보체제를 아․태지역에 도입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안의 하나로 판단하고 있으며(Lord 1993: 3) 아시아 지역국가들 역시 쌍무적, 소지역적 혹은 광역적 대화를 통해 국제평화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던 미국이 국제적 안전을 각국의 책임사항으로 돌리는 상황에서 국제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다양한 대화의 시도는 다자안보(multi-lateral security)라 일컬어지고 있으며, 우리 역시 당면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서 중․장기적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통일한국의 대외정책 수행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중요 문제점들과 현안을 예방 또는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자안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중이다. 당장 동북아안보대화(NEASeD)의 추이를 주목하는 우리의 관심사는 이 방안을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몇 가지 통일전략의 하나로까지 이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자안보에 거는 우리의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탈냉전 신국제질서의 도래와 북한의 정치․경제적 정세변화로 한반도의 평화통일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고 있는 것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아시아 각국들은 탈냉전 이후에도 여전히 나름대로 안보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유럽과는 달리 아시아 국가들간에는 역사적 배경, 민족적인 문제 그리고 영토분쟁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하여 군사 및 비군사적인 갈등요인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확실한 안보요인들 때문에 아시아 국가들에 있어서는 주변국들의 경제력, 군사적 영향력의 정도 및 입장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표출될 수 있고 통일된 집단의사결정을 이루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또한 관련국간의 쌍무적인 군사․안보문제에 대해서는 공동체적인 대응수단의 형성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아시아 특히 동북아지역국가의 경우 미국과의 쌍무적인 기본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미국 역시 아․태지역국가로서 이 지역의 다자안보체제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물론 아시아 지역에 있어서도 유럽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하기 위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3)와 같은 범아시아 안보협력체를 구성하여 이 틀 내에서 군사안보협력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단계 아시아에 있어서 유럽식의 군사․안보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므로 본 연구에서는 군사․안보공동체 형성을 위한 기본틀로서 시도되어야 할 다자안보협력에 관하여 그 의미와 필요성 및 제약요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다자안보협력의 의미
   다자안보협력이란 정치․군사․경제․사회․문화 등 포괄적 안보위협을 국가간 대화와 협력을 통해 사전에 방지 또는 해결함으로써 국제적 안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특히 탈냉전기에 있어 경제․환경․마약․영토․인종․종교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한 국지분쟁의 발발 가능성 증가 등 국제안보환경 변화에 따라 기존의 UN 등의 집단안보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등장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형 안보논의를 지칭하는 것이다. 다자안보는 “공동안보”(common security), “협력안보”(cooperative security) 등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나3) 탈냉전기의 변모한 국제안보질서하에서 “대화를 통한 안보유지”라는 기본의도는 일치하고 있다. 이는 국가간의 긴밀한 의사소통으로 국제적 안보환경을 개선함으로써 불신에 의한 군비경쟁과 대결을 극복․지양하고 공동생존과 안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노력의 포괄적 지칭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의 우선 목표는 상호이익 차원에서 공동규범과 제도를 창출하기 위한 대화의 습관화, 종국적으로는 이러한 대화 분위기 속에서 국제사회 안보를 유지할 수 있는 기초적인 규범을 만들고 나아가 분쟁해결 방안과 제도․절차를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of balance of power)이 탈냉전기에 들어 설득력을 상실하면서 다자주의로 대체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이의 특징은 예방외교적인 성격을 띄며, 활발한 안보대화로 군사적 투명성을 제고하는 등 신뢰구축을 이룩함으로써 기존 세력균형체제를 보완하거나 장기적으로 이를 대체하고, 비군사적 안보위협 요인까지 포괄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는 국제적 안전을 보장하는 논리적 근거로서 과거 냉전기의 “세력균형이론”(theory
2) 다자안보협력의 필요성 및 대두 배경
   탈냉전기 아시아지역은 대규모 전쟁위협이 사라지고 주요국간 관계가 발전적으로 변화하면서 신뢰와 협력기반이 구축되고, 상호의존성 증대와 더불어 경제적 번영이 급속히 진행되는 기회의 시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시기를 이용하여 평화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며 경제발전을 더욱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안의 모색이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정보․기술․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시장개방을 통한 경제발전 그리고 해상교통로의 안전 확보도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탈냉전 신국제질서의 수립으로 등장한 새로운 안보위협으로는 인종대립, 밀수, 마약, 환경오염,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영토분쟁, 군비경쟁, 종교갈등 등 역내 안보정세 관련 불확실성의 증대를 들 수 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군비증강 추세가 주변국의 불안을 야기하고 있으며, 당사국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의 지역패권 추구에 대한 우려는 역내 국가들의 안보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또한 북한의 핵문제로 야기된 대량살상무기 확산에 대한 우려도 점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역내 주요국간 양자관계의 발전적 변화에 따른 신뢰 및 협력기반 구축이 이루어지고, 이를 광역 차원에서 제도화할 경우 역내 안보증진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는 다자안보협력의 필요성을 더욱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유럽안보협력회의의 성공적인 출범에 따른 자극으로 시작되었고 아시아 지역에 CSCE를 그대로 이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변모하는 안보환경에 따른 다양한 안보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서 아시아 지역에서도 그러한 기구의 수립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기대와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더욱이 “회의의 연속체” 혹은 “UN의 유럽판”으로 불려지면서 애매한 형태의 대화기구로 머물던 CSCE가 1994년 12월 부다페스트 정상회담을 통해 분쟁의 예방과 해결을 추진하는 공식 위기관리기구인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로 위상이 강화되었고 아시아 지역에서도 유사한 안보협력기구가 아세안 확대외무장관 회담(ASEAN PMC: ASEAN Post-Ministerial Conference)과 아세안 지역포럼(ARF: ASEAN Re-gional Forum)4)의 형태로 활성화됨으로써 소지역적인 안보협력체제의 수립이 가능하며 또한 바람직하다는 긍정적인 인식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3) 다자안보협력의 제약요인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다자안보협력의 필요성에 대한 원칙적 동의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구체적 입장과 이해가 달라 실질적 추진에는 많은 시일과 인내가 요구될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국가들간의 동질적 가치의 결여와 역사적 반목, 이해상충은 다자안보협의체 구성의 원인이 되는 동시에 그것의 성공 여부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다자안보협력체제로의 수렴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국가관계(남․북한, 중국․대만)가 상존하고 있고 러시아․중국․북한의 국내정세 불안정이 지역 협력의 장애가 되고 있다. 또한 역내 국가간 신뢰 및 대화의 전통이 미약하고 동질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지리적 광활성, 정치․문화․경제․사회적 다양성, 국력의 차이, 군비경쟁, 일본 등 일부 국가의 과거 침략사와 관련된 민족적 감정 미해결 등 다양한 요인이 다자안보협력에 지속적인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자안보는 국가간, 민족간 역사적 동질성이 존재할 경우 순기능적으로 이루어짐을 유럽의 경험에서 볼 수 있다. 실제로 남사군도와 북방도서문제 등의 영토분쟁과 북핵문제 등 안보위협 요인이 상존하는 동시에 이들 문제의 해결과 관련한 다자안보협력체제의 활용가능성에 대한 관계국의 입장 차이는 쉽게 좁혀지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역내 안보주도권 관련 강대국간 경쟁도 심화되는 추세이다. 미국은 역내 안보주도권을 지속한다는 전제하에 관련국간 쌍무동맹관계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다자안보협력을 지지하는 입장이고, 일본의 경우 경제력에 상응하는 국제적 역할을 모색하면서 UN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하고 있고 아울러 PKO 등 해외파병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역내 안보패권 추구를 위한 군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원거리 투사능력 증대를 위한 항모전단 구성추진은 주변국에 잠재적 위협이 되기 충분하다.
   평등주의를 선호하는 동남아와 일방적, 쌍무적 외교의 전통이 있는 동북아 국가들이 공통의 적도 없이 하나의 틀 안으로 통합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다자안보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추진한다 하더라고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며, 다자안보는 모든 참여국들이 만족할 수 있는 속도와 방법으로 문제해결의 타협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내력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제도화를 먼저 추진하기보다는 공식 의제와 기구발전의 예정계획을 사전 결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민감한 안보문제에 대해 간접적이며 비대결적 자세로 접근해 가다가 종국적으로 모든 참여국들의 합의에 근거한 분쟁해결 메커니즘으로 발전시키는 방식(open-ended)이 바람직하다.
4) 다자안보협력에 대한 한국의 대응
국가들이 합의하고, 향후 이를 위해 활발한 대화와 접촉을 진행시켜가자는 차원에서 비정기적으로 회합을 개최하는 초기단계 수준이다.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한국은 외부의 군사위협을 최소화하고 지역안정 및 평화에 기여하며 장기적으로 통일에 유리한 안보환경을 조성한다는 차원에서 다자안보대화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접근하여 우리의 입장을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자주의는 냉전기 세력균형이론과 유사한 의미에서 탈냉전기 국제안보환경을 이끌어 가는 논리로 정착하고 있다.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체제의 현단계 진행상황은 탈냉전 신국제질서를 맞아 변화된 국제안보환경 속에서 국제평화를 보장하고 각국의 경제적 번영을 증진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 많은
   또한 다자안보 논의에 참여하는 각국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다양하며, 논의의 수준과 방식 역시 two-track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각국간의 협력분야 및 의제의 개발과 신뢰구축 방안 등 구체적 추진계획이 정립되어 다자안보가 본궤도에 오르기까지에는 많은 인내와 노력 그리고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으로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한 우리의 참여도 적극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현단계에서 한․미․일 3국간의 안보협력 추진과 한․미 쌍무동맹관계 유지는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제 구성과 별도로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제가 기존의 쌍무동맹 등 안보협력체제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 및 3국간 묵시적 합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아․태지역 평화를 위한 중요기구로 자리잡게 될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제를 위해 현단계 우리로서는 한․미간에 다자안보협력체제의 의제와 기구 구성형태, 참가국의 범위 및 구현시기 등에 대해 상호 견해를 자주 교환하자는 원칙적 입장표명만 해두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 각 사안에 대해 명확한 대안을 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자안보대화의 초기단계에서는 역내 국가간 대화의 습관화를 목표로 하는 정부․민간 차원의 회합이 중심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 다자안보대화가 실질적인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관련국간 신뢰를 바탕으로 군사적 투명성 제고, 군비통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 환경오염 방지, 해적․마약․테러퇴치 등 구체적 사업이 추진되어야 한다. 특히 군사적 신뢰구축에 바탕을 둔 투명성 제고나 군비통제 등의 조치는 기타의 여러 다자안보대화 의제들과 상호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 사실상 어느 의제가 다른 어떤 의제의 전제가 된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여러 차원에서의 대화가 진행되는 한편 간단한 수준의 실질적 조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신뢰구축이 점차 이루어지며,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의 실질적 조치가 가능하기 때문에 단선적으로 순서를 매겨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군사분야 신뢰구축이라는 의제가 상정된다 하더라도 다자안보대화에 대한 각국의 입장과 태도가 각기 다른 현 상황에서는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는 등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자안보대화에 참여하는 국가들은 당분간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해 군관련 인사들의 협의체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이외의 그 어떤 실질적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현상황에서 관계국간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해서는 군사적 투명성 제고를 위한 무기등록, 무력에 의한 분쟁해결 포기선언, 테러 및 해적 퇴치를 위한 관계국간 정보교환 및 상호협력, 군사훈련 관련정보의 사전통보 및 참관허용 등 의제를 고려해 볼 수 있다.
   다자안보의 성격상 어느 일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기 어려우며, 다른 국가들의 자발적 협조의지에 반해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만큼 다자안보에 접근하는 한국은 국제평화와 안정유지 그리고 한반도 평화적 통일달성이라는 정책목표를 원칙론적 차원에서 가능한 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알리고 관련국의 동의 내지는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이 아․태 영관장교안보토의를 주관함으로써 참가국간의 상호이해와 신뢰조성이라는 표면적 목표 이외에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아․태지역 국가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계기로 활용하는 것도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일환으로 역내 국가들간에 무기등록, 무력에 의한 분쟁해결 포기선언, 테러 및 해적 퇴치를 위한 관계국간 정보교환 및 상호협력, 군사훈련 관련정보의 사전통보 및 참관허용 등 군사적 투명성 제고를 위한 방안 등을 의제로 제안하는 한편 이의 구체적 실천을 위한 노력을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예방외교 분야에서 다루어질 사안이기는 하나 역내 국가간의 “무력침략 포기선언” 채택 등은 그것이 가지는 원칙론적이고 당위론적인 성격으로 인해 의미가 크게 부각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한반도 긴장상태 완화를 국제적 감시하에 둘 수 있는 조치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제안일 수 있을 것이다.
1961 세계대전쟁 世界大 25126 20105    아세안 지역포럼(ARF)은 원칙론적 대화의 단계를 넘어 구체적 다자안보조치를 논의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군사적 신뢰구축방안의
   현단계에서 우리가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다자안보대화는 ARF와 동북아협력대화(NEACD)를 들 수 있다. ARF는 당분간 군사분야의 별도 대화기구가 수립되지 않는 한 대화참여 과정에서 군사분야 의제개발 및 대책마련 등을 자문하는 선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태지역을 포괄하는 만큼 동북아 특히 한반도에 민감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 의제로 다루어지기는 어렵다. NEACD는 민간차원의 대화 형식을 빌리고는 있으나 동북아 6개국을 궁극적 대상으로 하는 한편 동북아안보대화(NEASeD) 성사와도 직결되는 것이므로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아․태 영관장교안보토의와 동북아안보회의는 현재 수준의 참여를 지속하면서 향후 ARF나 NEACD․NEASeD 등의 다자안보대화체에서 군사분야의 구체적인 의제가 거론될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이러한 노력과 병행하여 한국은 동북아안보대화(NEASeD)가 실질적으로 추진될 경우를 대비하여 한국이 주변국들에게 주도적으로 제의할 수 있는 동북아 및 한반도 안보증진 방안 등의 실천적 의제를 개발해두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아시아 지역공동체 형성은 21세기를 주도할 아시아의 역할과 위상을 보다 확고히 하고 아시아 지역의 공동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추구해 나아가야 할 이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 역사적인 관계 그리고 현
다른영화
관련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