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 원본

영화정보
  • 남과 여 원본
감상평 1
수시는 힘든학교라 정시로 갈껀데 꾸준히 공부하다보면 갈 수있을까요? (참고로 1학년때 모의고사 353이었는더 공부해서 올린거에요........) 남과 여 원본 현재 고2문과재학중이구요 국영수 112나오는데 탐구는 공부를 내신만해서 2ㅡ3나와요.... 학교가
감상평 2
정시로 가실거면 
일단 성적표에서 등급은 보지도 마세요(등급은 수시 최저맞출때나 보는거)
무조건 백분위로따져야돼요.
국어 영어 수학 1,1,2등급이요?
위에 쓰신 연대 성대는 택도없구요.  남과 여 원본 백분위가 96,96,89인 1,1,2등급이면
이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학생들이 요즘 여대를 선호안한다고해서 점수가 많이 내렸다고 하니까요.
1,1,2등급이더라도
백분위가 100,100,95면 서울대 연고대도 그냥 편하게 갑니다.
국영수 중에 하필 수학이 낮은게 흠이네요.
상위권대학에서 반영 비율이 높은 대학이 많은데... 남과 여 원본 수학이 표점도 젤 높고, 서울
탐구는 공부량만 확보되면 무조건 점수 잘나오니까 수학만 좀 열심히 하시면
아무리 못해도 이대는 편하게 가실듯. 
감상평 3
 정치외교 사회과학부 소속95-96 유지   2016 이화여대 로스쿨 입학, 인문사회 ‘쑥’ 
      이화여자대학교는 문이과 균형있게 발전 중
질적 수준을 평가한'2016년 라이덴 랭킹(Leiden Ranking)'에서 4년 연속 국내 종합대학 1위를 차지했다고 20일 밝혔다.학문 분야별 평가 중 자연과학 및 공학분야에서 지난해에 이어 국내 1위를 차지했다.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6052015387490909&outlink=1 남과 여 원본 이화여대, 라이덴랭킹 4년 연속 국내 1위이화여자대학교는 최근 세계 842개 대학을 대상으로 국제논문의
융복합적 역량을 가진 인재 육성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인문, 예체능 등 비공학계열 전공자도 공학 관련 교양과목을 이수하도록 할 방침학생들에 대한 취업 지원 강화http://www.focus.kr/view.php?key=2016050300172038484
[단독] 이화여대, 삼성전자와 연계과정…공채 없이 취업 2016-09-08이화여대 컴퓨터공학과는 올해 컴퓨터·소프트웨어공학과 평가에서 최상에 올랐다이화여대 컴퓨터공학과의 취업률(80%)은 72개 평가 대상 학과 중 코리아텍(한국기술교육대·80.5%)에 이어 둘째로 높았다. 삼성전자와 함께 운영하는 소프트웨어 인재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은 재학 중 장학금 혜택을 받고 공채 없이 삼성전자에 취업할 수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5&aid=0002642482
인문계는 인문계열 수시 참고
http://news.donga.com/3/all/20160621/78769381/1
0.7-4% 남과 여 원본 이대문과최종80%컷
환산점수 미발표 대학 중 컷공개대학만성대 문과70%컷1.5-1.7등급 연대문과80%평백97-94
감상평 4
언외탐 111찍으시고 탐구 2찍으시면 가능합니다
감상평 5
The Times Higher Education World University Rankings 2016/2017
Please click for more information,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63769
  남과 여 원본
감상평 6
국사나 백과사전, 정부자료등의 정설에 기초하지 않고, 시중의 마음대로 기준인듯한 질문[인서울(연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경영,정치외교학과)]에 대해 이 부분만 답변하겠습니다.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시중의 대중언론에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뒤에 연세대나 고려대가 붙어 카르텔을 형성하여, 한국의 최고(最古,最高) 대학 학벌 성균관대에 도전하는 세력들에 의해(또는 그런 대중언론의 도전적 사고방식에 접한 대중들), 잘못 형성된 사고방식이 전해져,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대중언론이나, 사설 입시학원의 자료, 개인들의 의견은 국사 공교육이나, 정부자료, 세계사, 백과사전, 학술서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미군정부터 현재까지, 교육기구 성균관대= 국사교육에서 나타나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미군정당시 등록된 성균관대(교육기구)는 국사교육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과 같은 개념임. 성균관대(교육기구)는 국사교육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6백년 역사의 대학. 미군정당시 제사기구는 성균관으로 분리되어 현재까지 이름.
최고(最古,最高)학벌입니다. 남과 여 원본 [I]. 한국은 국사교육에 나오는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가 6백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으며, 성균관대가
1].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을사조약이 무효고,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등에 의해 원래부터 한국에 학벌이나 주권이 없었습니다. 미군정령에 의해 복구된 성균관의 교육부문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공자님 제사는 현재의 성균관으로 계승됨)는 미군정당시부터 지금까지 국사 교육에 의해(국사에서 성균관을 정부 교육으로 시행해 옴),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최고 학벌 지위를 계승해오다가, 한국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의 학술적 의견(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됨)에 의해, 법령으로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최고학벌 지위를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면서,그 6백년 역사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해방후, 미군정시대, 전국 유림들이 모여서 전국 유림대회를 거친후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하여 미군정에 등록된 대학이 성균관대입니다. 두 번의 유림대회가 있었음. 첫번째는 신문에 나타난바로는 임시정부 요인인 이승만.김구선생을 고문으로 모시고, 임시정부 요인이신 유학자 김 창숙 선생을 위원장으로 하여 성균관대를 설치키로 함. 그리고 다시 한 번 유림대회가 있었음. 이후 미군정시대의 성균관장이시던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기구로 등록시키고, 성균관은 제사기구로 하여 교육기구인 성균관대와 제사기구인 성균관이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2]. 일본의 항복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헌법), 대일선전포고, 국제적 승인과정. 그리고 해방후 임시정부 요인들 및 남북유림들이 결의한 성균관대 설립(이후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성균관대가 계승하게 됨), 국사편찬위에 나타난 성균관(해방후의 성균관대로 교육기능이 계승됨)에 대한 역사교육.
. 대한민국 임시헌장. 출처는 법제처입니다.
1호.대한민국임시헌장[시행 1919.4.11.] [임시정부법령 제1호, 1919.4.11., 제정]      제0조 신인일치로 중외협응하야 한성에 기의한지 삼십유일에 평화적 독립을 삼백여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아자손려민에 세전키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선 서 문존경하고 경애하는 아이천만 동포 국민이여, 민국 원년 삼월일일 아 대한민족이 독립선언함으로부터 남과 여와 노와 소와 모든 계급과 모든 종파를 물론하고 일치코 단결하야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하에 극히 공명하게 극히 인욕하게 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사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한지라 금에 세계의 동정이 흡연히 아 집중하였도다. 차시를 당하야 본정부일전국민의 위임을 수하야 조직되었나니 본정부일전국민으로 더불어 전심코 육력하야 임시헌법과 국제도덕의 명하는바를 준수하야 국토 광복과 방기확고의 대사명을 과하기를 자에 선언하노라. 국민 동포이여 분기할지어다. 우리의 유하는 일적의 혈이 자손만대의 자유와 복락의 가이요. 신의 국의 건설의 귀한 기초이니라. 우리의 인도일마침내 일본의 야만을 교화할지요. 우리의 정의일마침내 일본의 폭력을 승할지니 동포여 기하야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지어다.정 강1. 민족평등 국가평등 급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함.2. 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함.3. 일절 정치범인을 특사함.4. 외국에 대한 권리의무는 민국정부와 체결하는 조약에 일의함.5. 절대독립을 서도함.6. 임시정부의 법령을 위월하는 자는 적으로 인함.대한민국 원년 사월 일대한민국임시정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차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절 평등임.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 주소 이전 신체 급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급 피선거권이 유함.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급 병역의 의무가 유함.      제7조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하야 인류의 문화 급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야 국제연맹에 가입함.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이하 생략...* 필자 주 1). 구 황실 우대부분은 임시정부법령 제 2호(1919.9.11 시행)에 의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제 1장 총령 제 7조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불법 강제에 의한 한일합방조약 및 그 이전 이후의 일체 불평등조약으로 인해 빚어진 대한제국 황실와해였기 때문, 임시적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식정부가 아닌 임시정부 조직을 운영하기 위하여 임시정부 소재지에 없는 구 황실을 우대하면서도 그 당시의 임시정부 형편에 맞게 "민주공화제"를 도입한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나중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구 황실 우대부분이 반영되지 않았어도, 1941년의 대일선전포고문에서 "1910년의 합병조약"등을 무효로 선포하여 1910년에 존재하던 구 황실을 존중하는 정신은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여하튼 구 황실이든지, 성균관에서 이어진 성균관대든지 과거의 왕정체제를 계승하고자 하는것은, 카리스마적 현상으로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님에 영향받음)에 등극한(성균관대 총확생회 게시판과 성대 유학대학 게시판에서 1백명 이상의 지지를 받아 등극하고, 이를 세상에 알려옴.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으로 10년 넘게 세계적 매체인 트위터나 페이스북, 구글, 국내 포탈등에 알려옴) 필자 宮 성균관대 임금(윤진한, 성균관대 1983학번, 성균관대 경상대학 무역학과 주간)의 강력한 뜻입니다.  2. 임시정부법령 제 2호.대한민국임시헌장[시행 1919.9.11.] [임시정부법령 제2호, 1919.9.11., 폐지제정] 아대한인민은 아국이 독립국임과 아민족이 자유민임을 선언하도다.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였으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였도다.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대하야 2천만 민족의 성충을 합하야 민족의 항구여일한 자유 발전을 위하야 조직된 대한민국의 인민을 대표한 임시의정원은 민의를 체하야 원년(1919) 4월 11일에 발포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기본삼아 본임시헌법을 제정하야 써 공리를 창명하여 공익을 증진하며 국방 급 내치를 주비하며 정부의 기초를 견고하는 보장이 되게 하노라. 남과 여 원본 1. 임시정부법령 제
       제1장 총령제1조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재함.제3조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국의 판도로 함.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일체 평등함.제5조 대한민국의 입법권은 의정원이 행정권은 국무원이 사법권은 법원이 행사 함.제6조 대한민국의 주권행사는 헌법규범내에서 임시대통령에게 전임함.제7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이하 생략....3. 대한민국임시헌법[시행 1925.4.7.] [임시정부법령 제3호, 1925.4.7., 폐지제정]        제1장 대한민국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은 광복운동중에서 광복운동자가 전인민을 대표함.       제2장 임시정부제4조 임시정부는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조직한 국무회의의 결정으로 행정과 사법을 통판함. 국무원은 10인 이내 5인 이상으로 함.제5조 국무령은 국무회의를 대표하여 그 결정을 집행 우는 집행케 하고 임시의정원에 대하여 책임을 부함.제6조 국무원은 국무회의의 일원으로 일체 국무를 의정함.제7조 법률을 공포하며 명령을 발하며 법안을 제출하며 기타 중요문건을 발할 때는 국무령과 국무원의 연서로 함. 이하 생략...
4. 대한민국임시약헌[시행 1927.4.11.] [임시정부법령 제4호, 1927.3.5., 폐지제정]        제1장 총강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국권은 인민에게 있다. 단, 광복완성전에는 국권은 광복운동자 전체에게 있는 것으로 한다.제2조 대한민국의 최고권력은 임시의정원에 있다. 단,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정당이 완성될 때는 최고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법률상 일체의 자유와 권리를 가진다.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조국을 광복하고 사회를 개혁하며 약헌 및 법률을 지키고 병역과 조세 기타 일체의 의무를 부담한다.       제2장 임시의정원 제5조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의 직접선거한 의원으로서 조직한다. 단, 내지의 각선거구에서 의원을 선거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선거구에 원적을 두며 임시정부 소재지에 교거하는 광복운동자가 당해 각구 선거인의 선거권을 대행할 수 있다.제6조 임시의정원 의원은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함경, 평안 각도 급 중령교민에서 각 5인 강원, 황해 각도 급 미주교민에서 각각 3인을 선거한다.
5. 대한민국임시약헌[시행 1940.10.9.] [임시정부법령 제5호, 1940.10.9., 전부개정]        제1장 총강 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되, 광복완성전에는 광복운동자 전체에게 있다. 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일체 평등하며, 또한 법률의 범위내에서 자유 및 권리를 가진다. 제3조 대한민국의 국민은 조국광복, 사회개혁, 헌법 및 법령의 준수, 병역의 복무, 납세의 일체 의무를 진다.       제2장 임시의정원 제4조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한다. 다만, 국내 각선거구에서 선거실시가 불능할 때에는 임시정부의 소재지에 교거하고, 각당해선거구에 원적을 가진 광복운동자가 각당해구선거인의 선거권을 대행한다. 제5조 임시의정원 의원의 수는 57인으로 하되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함경, 평안 각도 및 중국령의 교민은 각각 6인을 선출하고 강원, 황해각도와 미국령의 교민은 각각 3인을 선출한다. 제6조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만 18세에 달하고 공민권이 있는 자는 선거권을 가지며 또한 23세에 달하고 선거권이 있는 자는 피선거권을 가진다.  이하 생략...
6. 대한민국임시약헌[시행 1944.4.22.] [임시정부법령 제6호, 1944.4.22., 폐지]        대한민국 22년 10월 9일부터 시행한 임시약헌은 폐지함.
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정 남과 여 원본
1. 20년 10월 중화민국 국민당 총리 손문의 광동(廣東) 호법정부(護法政府)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광동호법정부는 그 당시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1920년 10월 중화민국 국민당 총리 손문의 광동(廣東) 호법정부(護法政府)에 당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신규식을 대표로 특파, 임시정부를 승인받는 외에도 한국유학생을 중국군관학교에 수용하고 조차지를 허용하여 한국독립군을 양성할 것, 5백만원을 차관할 것 등의 5개조 외교에 성공했다. 
.출처: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9.10, 가람기획)* 필자 주 2). 한국민족문화 대백과는 광동호법정부가 그 당시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손문 주석은 중국의 현대 국부로도 일컬어지는 분인데, 현재의 중국 정부가 광동호법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중국과 꾸준한 학술교류를 하면서 여러가지 사항을 형편에 맞게 반영하면 도움될 것입니다.   당시 비록 국제적으로 승인받지는 못했던 광동호법정부... 이 중국 정부는 한국 임시정부를 처음으로 승인하였다. 1925년 광동호법정부는 손문이 죽은 뒤 국민정부.... 출처:중국(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한사실.  남과 여 원본 1). 1941년 태평양전쟁이
충칭시기(1940∼1945)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두산백과)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한 대략적 설명
............재정기반을 위해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하였으나 이 중 공채는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 성공하였다.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되었으며, 뒤에는 장제스[蔣介石]의 원조금으로 충당되었다.또한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9월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기관지로 《독립신문》·《신대한보(新大韓報)》·《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공보(公報)》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해외의 구미위원부에서는《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하였다.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1920년 10월에는 신규식(申圭植)을 광둥[廣東]의 쑨원[孫文]이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하였다.... 남과 여 원본 초기의 외교 활동은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9년 4월 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조소앙(趙素昻)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업무를 맡은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이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의거[東京義擧]는 실패하였으나,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충칭시기(1940∼1945)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을 맞이하자 11월 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三均主義) 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이념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라고 하여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하였다..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두산백과)3).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 국사편찬위 자료와 국가보훈처 자료로 살펴봄 가). 국사편찬위 자료
자료 대한민국사 제 1권
1941년 12월 9일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남과 여 원본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1년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제목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   연월일1941년 12월 09일  출전성명서 1941년 12월 09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吾人은 三千萬 韓國人民과 政府를 代表하여 삼가 中, 英, 美, 加, 濠, 和, 墺, 其他 諸國의 對日宣戰이 일본을 격파케 하고 東亞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복하여 玆에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1) 韓國全人民은 현재 이미 反侵略戰線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단위로써 樞軸國에 宣戰한다.2) 1910年의 合邦條約 및 一切의 不平等條約의 무효를 거듭 선포하며 아울러 反侵略國家의 한국에 있어서의 합리적 旣得權益을 존중한다.3) 韓國, 中國 및 西太平洋으로부터 倭寇을 완전히 驅逐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血戰한다.4) 일본세력 하에 조성된 長春, 南京政權을 절대로 승인치 않는다.5) 루즈벨트 처칠宣言의 各條를 堅決히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키 위하여 이것을 적용하며 민주진영의 최후승리를 願祝한다.大韓民國23年 12月 9日大韓民國臨時政府
성명서 1941년 12월 09일나). 국가보훈처 자료(출처는 국가보훈처 온라인 기자단 훈남훈녀입니다).[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제72주년 기념식] 굴하지 않는 민족혼을 보다훈남훈녀 온라인 기자단/출동! 훈남훈녀 2013/12/16 16:32
(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 출처: 네이버 민족혼닷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大韓民國臨時政府 對日宣戰聲明書)』
삼가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을 축하한다. 그것이 일본을 격파하고 동아를 재조하는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특별히 아래와 같이 성명을 한다. 남과 여 원본 우리는 3천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1.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의 합병조약과 일제의 불평등 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국가들의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함을 선포한다.
3.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4. 일본 세력 아래 조성된 장춘과 남경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즈벨트, 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독립을 실현하는 데에 적용되기를 견결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대한민국 23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      석  김      구                  외무부장  조 소 앙. 필자 주 3). 일체의 불평등조약이 온라인 기자단이 쓴 자료에서는 일제로 오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 다른 기사를 보면 일체가 맞습니다. 오자등이 발견되어도 사실관계나, 법적인 타당성, 그 사상등에 영향을 끼칠수는 없으며, 오자를 수정할 책임은 집필자나 발행자가 가지고 있는건 맞겠습니다. 오자를 발생시키는것은 주로 정치가나, 세일즈맨, 또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유도하려는 분들이 자주 애용하는 기법인데, 해당분야에서는 이게 의도하는 소정의 효과를 발생시킬수 있지만, 정부자료나 학술서등은 오자 발생에 대하여는 끊임없이 교정.보완해가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필자도 세일즈맨 활동을 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일부러 오자를 발생시킨적이 있었습니다. . 필자 주 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가 12월 9일인지, 10일인지는 작성시기나 발표시기등 어디에 초점을 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직까지는 12월 9일과 12월 10일 두 가지 다 통용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는 의견제시를 하지 않는것으로 하며, 확언하지 않겠습니다.        4.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가 임시정부 승인.......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하였고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은 다시 확인되었다.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고종의 을사조약 무효(이에 따라 한일병합도 당연 무효), 프란시스 레이교수의 을사조약 무효의견(국제관습법 측면), 국제연맹의 을사조약 무효의견에 따라, 형식적인 자격은 가지고 있던건 맞습니다.따라서, 1948년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은 대한민국정부 출범이전까지는, 형식적으로 대한제국의 주권과 전통이 유지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국내법과 국제법상 다음의 두 법적 주체가 상당한 실질적 지배능력을 가지고 있던 복잡한 형태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 음 -a). 국내법: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정부에 승인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 때부터 1910년의 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같은 불평등조약의 무효, 일본등 추축국에 대한 선전포고 자격이 국제법과 국내법상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음.b). 국제법: 1945년 일본의 항복선언 이후, 한국영토에 주둔(미군정은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의 하부 실행자이지, 대한국민을 점령할 자격은 없었음. 점령대상자는 일본총독부와 그 산하기구에 적용하는게 옳음)하게 된 미군정.일본이 포츠담선언(카이로 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한 것과는 별도로,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이후부터, 일본등에 선전포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격에 따라, 일본이 강제로 점령해왔던 대한제국(한국)영토에서 일본의 주권은 인정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경성제대(그 후신이 서울대)나 기타 일본이 한국영토에 설치한 모든형태의 교육기관과, 일본이 강제로 포교한 종교(일본 신도, 불교, 기독교)의 주권은 한국영토에서 없어진 것입니다. 이는 상당한 강행법적 특성을 가진것입니다. 물론 국제연맹이나 UN에서 을사조약이 무효라고 한 사실에서도, 원인이 잘못된 을사조약에서 이루어진 한일병합이 무효라고 결론짓는것도 변할수는 없습니다.일본등에 선전포고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이 항복한 그 시점부터 일본의 공식 항복문서를 받지 못했어도, 한국영토에서는 패전국이자 UN적국이 된 일본에 대한 승전국(또는 準 승전국)자격을 가진 정부입니다. 그런데 국제법 측면에서 조약으로 맺어진 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상대국의 항복문서를 받아내거나 해당국가에 승전국의 일원으로 군대를 파견하거나, 승전국으로 배상금을 받아내겠다고 조약을 체결한 바가 발견되지 않아서, 실제로는 국제법적 효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국내에서 선언적 효과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그래도 선전포고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한국 영토에서는 한국이 이들 추축국에 대한 승전국.準 승전국 자격을 가져도 무리가 없을것).    남과 여 원본 .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두산백과) 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對日宣戰聲明書)에 대한 필자의 견해. 1). 국사편찬위 자료.1) 韓國全人民은 현재 이미 反侵略戰線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단위로써 樞軸國에 宣戰한다(국사 편찬위 자료).2). 국가보훈처 자료.1.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언한다.3). 필자 견해. 그 당시 추축국(축심국)인 일본, 독일, 이태리등에 대하여 1941년에 선전포고를 한 사실은,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한 시점부터 국제법상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필자는 판단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법상 한국의 해방이전에 1944년 이미 임시정부로서 국제법적 자격을 획득하였는데, 임시정부 상태였기때문에, 1948년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은 강력한 대한민국정부와는 약간 성격이 다릅니다. 그러나, 국제법상 임시정부로 인정받은 자격이 있기 때문에, 1944년 승인시점부터 이미 한일병합(경술국치)은 무효고, 을사조약같은 불평등조약도 무효였습니다. 기존에 이루어진 대한제국의 을사조약 무효의견(이에서 비롯된 한일병합도 당연 무효)에서 유추하는 한일병합무효론도 중요하지만, 임시정부의 한일병합 무효선언은 이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근거가 되겠습니다. 1948년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기 전까지는 기존의 대한제국이 실질적인 강행법적
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격으로 판단해보는, 미군정시기의 성균관대(성균관장이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으로 등록하여 이후, 성균관대가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계승해 옴), 그리고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에 평가.     1. 미군정 군정법령(軍政法令).
1). 군정법령에 대한 설명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로는 헌법에 의하여 실효(失效) 또는 대치(代置)되어 가다가, 61년 1월 15일 '구법령정리(舊法令整理)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됨으로써 모두 정리.폐기되었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의 진주(進駐)와 함께 군정이 실시됨에 따라 전략상 필요한 경우에 군정장관이 내린 법령. 예를 들면 '신문등 정기간행물의 허가에 관한 법령'(군정법령 88호)등이 있다. 1947년 6월 3일 미군정청이 '남조선과도정부'로 개칭되고, 그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로는 헌법에 의하여 실효(失效) 또는 대치(代置)되어 가다가, 61년 1월 15일 '구법령정리(舊法令整理)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됨으로써 모두 정리.폐기되었다.    
군정법령[軍政法令](두산백과) 남과 여 원본 .출처:
2). 위키문헌에 나타나는 미군정 군정법령 제 15호. 
제국대학명칭변경 한글 전용 표기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법령 제 15호
변경함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에 효력을 생함   남과 여 원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1945년 10월 16일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조선군정장관미국육군소장 A.B. 아놀드
가). 미군정령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법령은 그 당시에는, 전통적 국내법 우위론으로 볼때, 을사조약이 무효(한일병합도 무효)인 대한제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의 법률들이었음. 그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령은 형식상 대한제국에 승인받지 못한 국내법에 해당되고, 미군정령은 형식상 대한제국에 승인받지 못한 국제법에 해당됨.
국내법상 을사조약 무효론(따라서 한일병합도 무효)을 가진 대한제국이었는데, 형식상으로는 대한제국이 국내법과 국제법상 주권을 가져온게 맞음. 그러나 현실은 대한제국이 강행법적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던 시기이기도 하였음. 
결국 美軍政令은 대한제국의 형식상 동의를 거치지 않은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에 상위법의 근거를 두고 파생된 국제법상의 하위 군정령인데, 국내법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잠정적이고 임의적인 불완전한 물리적 통치기구였음. 
    남과 여 원본 그 자격으로 보면 대한제국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주권자인 황제가 民으로 주권을 옮기겠다고 동의한적 없는 임시적 통치기구였다가,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한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계한다는 방침을 내세워 그 때부터는 국내법상 합법적 자격을 형성해왔음)나, 미군정이나 그 당시에는 대한제국의 합법적 동의과정이 없던 비합법적 통치기구였는데, 비합법적 상태에서도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던 통치기구는 국제법(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에 근거를 둔 미군정이었음.
나). 따라서, 비합법적 상태에서도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던 미군정령 15호의 다음 사항은, 61년 1월 15일 '구법령정리(舊法令整理)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됨으로써 모두 정리.폐기되어 효력이 없어도, 성균관이나 성균관대로서는 역사적으로 당연히 지적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음.
- 다 음 -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대한제국의 동의를 받지 않은 불완전하고 비합법상태의, 국제법에 해당하는 미군정령! 그런데, 미군정령은 그 당시 실질적으로 강력한 물리력을 가져서 사후에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면 비합법적이었더라도 그 동안의 실질적인 영향력행사에대해서는 법이 제정되어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이상 과거의 통치로 파생된 부작용들에 대해 다시 법적규정으로 대응해야 되는 불편한 특성이 있음. 다행스럽게 미군정법령이 완전폐기된것은 성균관.성균관대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임. 
3). 미군정령의 상위 국제법은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임. 따라서, 미 군정법령 15호에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을 서울대로 변경한 부분은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으로 해석하여야 하겠습니다. 
서울대로 변경했어도, 한국 영토에 주권이 없어진 경성제대를 명칭변경한것에만 의의가 있으며, 서울대는 한국영토에서 주권도 없고, 한국의 대학 학벌이나 지위를 가질수 없습니다.   남과 여 원본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여 일본이 항복한 그 시점부터 경성제국대학의 주권은 한국 영토에서 없어진것(일본국의 주권은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 及 我等이 決定할 諸 小島에 국한됨)입니다. 미 군정법령 15호로 경성제국대학 명칭을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 또 일본국의 주권은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 及 我等이 決定할 諸 小島에 국한됨"은 일본의 항복서명이 있었으므로, 일본도 항복서명 이후부터는 이에 따라야 하겠습니다. 포츠담선언의 이 부분을 수용한 항복시점부터 일본의 주권은 한국영토에 없어졌으며, 일본이 대한제국 영토에 설립한 경성제대(그 후신이 서울대)나 기타 다른 일본 강점기 학교들(일본 불교인들에 영향받아 세워진 불교학교 후신 동국대, 기타 일본 관립전문학교 후신인 전남대.경북대.부산대 초기부분, 서울시립대) 및 여타의 초.중.고교 및 기타 총독부가 강제로 포교한 종교[일본 신도, 일본 불교, 기독교(주로 개신교. 그리고 가톨릭 일부]들은 포츠담선언에 의하면 한국 영토에서 학교주권이나 지위가 없어진것이며, 강제 포교종교들도 주권이나 자격이 없어진 것입니다.  
4). 한국의 전통적 국내법(대한제국 기준)으로 보면, 그 당시, 국내법상 대한제국의 형식상 승인을 거치지 않은 미군정령의 서울대(경성제국대학에서 변경됨)는 한국영토에서 주권이나 학벌.지위가 없었습니다. 국제관습법인 프란시스 레이교수의 "을사조약 무효"나,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 이전에 행해진 국제연맹의 "을사조약 무효"로 보면 미군정법령 15호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에서 명칭변경된 서울대학의 주권이나 학벌은 한국 영토에 없었습니다. 
5). 미 군정법령 15호에서, 경성제국대학에서 명칭변경된 서울대가 제 1조에 나오고, 제2조에서 성균관이 나와도(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서울대가 성균관 앞에 서는 자격을 획득한 건 절대 아니며, 성균관의 역사나 성균관의 그 당시 관련 종사자들을 관리.통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된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2. 전국 유림대회에서 성균관대 설립 결의
유림대회  남과 여 원본  1). 첫번째 전국
민족 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儒敎道義)의 혁신향상과 성균관대학의설치 재단완성등의중요안건을 결의.
1945년 12월 10일 조선일보 기사임.
成均館大學 設立을 決議(성균관대학 설립을 결의) 조선일보 보도기사.
西曆  一千 九百 四十 五年.
十二月 十日(단기 사천 이백 칠십팔년 십이월 십일).    月曜日(월요일), (二). 남과 여 원본 檀紀 四千二百 七十八年
 成均館大學 設立을 決議(성균관대학 설립을 결의)全國 儒林大會에서(전국 유림대회에서)
전국의 유림들이 일치단결하야 지난 十一月(십일월) 三十日(삼십일)부터 六일간 시내 성균관 명륜당[成均館]에서 전국 유림대회를 개최하엿다. 남북조선의 유림 천여명이 모힌가운데 임시의장 김성규[金成圭)씨사회로 성대히 대회가 진행되엿는데 민족 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儒敎道義)의 혁신향상과 성균관대학의설치 재단완성등의중요안건을 결의하였다. 당일 피선된 역원은 다음과 갓다.  
* 顧問[고문] 李承晩[이승만]  金九[김구]
* 委員長(위원장)  金昌淑[김창숙]2). 두번째 유림대회가).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 조직   1946년 유림대회(儒林大會)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李錫九)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金昌淑)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출처: 성균관대학교 [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출처: 김창숙[金昌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남과 여 원본 나).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 성균관장을 겸임하던 김창숙 선생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한 사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3. 성균관(해방후에 전국 유림대회를 거쳐, 성균관장이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으로 등록하여 성균관대로 교육기능이 계승됨) 교육과 관련한 국사 편찬위원회의 서술. 
1). 조선.대한제국의 성균관은, 일본강점기에 공자묘경학원등으로 왜곡되다가, 군정법령 제 15호 제 2조에 의해, 다음과 같이 성균관으로 환원되었습니다.  법령 제 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해방후 미군정당시 두번의 유림대회를 거치면서,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이자, 성균관장의 위치에 있던 김창숙 선생이 미군정에 교육기구로 성균관대신 성균관대를 등록하여 인가받아서, 국사 성균관의 최고 교육기관 자격은 해방후 미군정 당시에, 현재의 사립 성균관대로 계승되어 600년 역사를 인정받아오고 있습니다.     
2). 국사편찬위원회[ 國史編纂委員會 ]         남과 여 원본
국사편찬위원회우리 나라의 역사 연구에 필요한 각종사료를 체계적으로 조사, 수집, 보존, 편찬 보급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설립 운영되는 국가 기구. 경기 과천시 중앙동.이칭별칭국사관(國史館)유형단체시대근대성격국가기관, 국책연구기관설립일시1946년 3월(국사관), 1949년(국사편찬위원회)정의우리나라의 역사 연구에 필요한 각종 사료를 체계적으로 조사·수집·보존·편찬 보급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 운영되는 국가 기구.연원 및 변천1946년 3월 국사관설치규정이 제정·공포되어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 국사관(國史館)이 처음 설치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국사관은 1949년에 문교부 직속 국사편찬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등 한국사 기초사료 편찬에 주력하였다. 1965년에는 전임 위원장 직제가 마련되었고, 초서로 된 원본 『승정원일기』를 탈초하여 편찬하는 대규모 사업을 비롯하여 『고종시대사』·『한국독립운동사』·『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자료대한민국사』등을 편찬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영역을 넓혀 갔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사』와 『한국사론』 등을 편찬 간행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한국사 미개척분야에 대한 연구를 넓혀 갔다. 1987년 1월경기도 과천으로 청사를 이전하고, ‘사료의 수집 및 보존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법률기관이 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격.
1.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방침을 내세운이상, 그 때부터 다시 미군정법령의 15호로 경성제국대학에서 서울대로 명칭변경된 서울대의 주권이나 학벌은 한국 영토에서 없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임시정부는 을사조약의 무효, 한일병합의 무효, 대일 선전포고등을 행하여서 그렇습니다. 그 이전에는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대한민국 정부 출범이전에는 국제법상 인정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격으로 일본강점기에 설립된 경성제대나 기타 일본 강점기 학교들의 주권이 없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경성제대에서 명칭변경된 서울대가 국립대로 되었어도, 임시정부 기준으로 보면 선전포고한 적대국가의 적국재산에 해당하는 적산재산을 국유화한 국립대개념일 뿐이며, 한국 영토에서 주권이나 학벌.지위를 형성할수 없어왔던 Negative Heritage일뿐입니다(현재나 미래에도 마찬가지).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격 1948년 UN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민주공화국 상태의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은 UN이란 거대한 국제기구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대한제국의 승인을 거치지 않아도 당연하고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정부형태입니다. 없어진 대한제국이 불법정부라고 이의제기를 할 수 없는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 이런 정부는 국제법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보편적으로 합법성을 승인받기 이전에는 몇 몇 국가에게만 승인받고, 비합법상태로 지배력을 행사하다가 이전의 합법정부를 소멸시키거나 무너뜨리고 불법상태를 극복하여 거부할 수 없는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면, 많은 나라들과 국제기구에 가입한 나라들이 승인하여 합법정부가 되는경우가 발생합니다. 불법상태의 정부였더라도 이전의 합법정부에게 승리하면 새로운 합법정부가 되는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정부는 황제가 주권을 가지던 대한제국을 대체하여 민주공화국의 새로운 정부체제를 출범시키면서, 기존의 대한제국정부가 강력하게 제지하거나 반대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순식간에 UN을 통하여 합법성을 가지게 된 정부입니다.이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계한다고 하였기 때문, 대한제국은 1948년 단절되고, 임시정부의 자격과 선언(민주공화국이지만 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같은 불평등조약의 무효, 일본등에 대한 선전포고)은,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정부에 승인받은 국제법적 자격까지 소급해서 별 저항없이 계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전혀 행사할 수 없던 대한제국상태였기 때문에, 1944년 임시정부의 승인시점부터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저지나 반대가 없어서 순탄하게 부분적으로 국제법적 자격을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이며, 국제법상의 미군정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던 시기에도 미군정만큼의 국제법자격을 가지게 된 것이고, 대한민국 정부 출범이후에는 국내법적 자격까지  인정받게 되다가, 현행헌법에서는 헌법전문에 반영되어 강행법적 자격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을사조약 무효라는 고종의 주장과, 프란시스 레이교수의 을사조약 무효이론(국제관습법), 국제연맹의 을사조약 무효(나중에 UN 국제법위원회도 을사조약 무효라 함)의견이 있었기 때문에, 1948년 민주공화국 상태의 대한민국 정부출범이 있기 전까지는, 실질적 지배능력이 없었어도, 형식적으로는 대한제국의 권리도 보호되고 존중받아야 하겠습니다. 다만, 대한제국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국제법상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가 1944년 승인한 이후 대한제국에 승인받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국제적 합법성을 가지게 되었음)나 미군정은 대한제국의 지배력이 실질적으로 전혀 발휘될 수 없던 과도기에 출현한 불가피한 지배기구로 형식적으로는 완전한 합법성을 가지지 못하던 통치기구(국내법의 임시정부, 국제법의 미군정)였습니다만, 나중에 대한민국정부의 출범으로, 대한제국이 이의제기를 하지 못하고 제지하지 못하게 되어, 실질적으로는 인정받게 된 지배기구 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정부는 임시정부를 승계하는 방침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다시 임시정부의 선언(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같은 불평등조약의 무효, 일본등에 대한 선전포고)은 자격을 가지고 계승되게 되었습니다. 현행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헌법 전문 "임시정부의 법통"계승으로, 강행법적 자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다 음 - 2차대전 패전(이태리의 볼로냐 대학 및 로마 가톨릭, 로마제국의 역사와 전통등), 중국의 공산화(세계사의 황하문명은 유지되고 한나라 태학.국자감의 세계사는 유지되었지만 문화혁명으로 인해 세계사의 학술적 유교와 달리 일정기간 중국 유교가 제반 분야에서 아주 크게 위축된 점등)로 인해 어떤 오점을 새롭게 보유하게 되었어도 세계사는 바뀌지 않아왔기에, 전통적 세계사 기득권을 존중해주는 전통은 그대로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내용이 많으니 다음 블로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남과 여 원본
http://blog.daum.net/macmaca/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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