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무료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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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평 1
ㅠ 부탁드립니다내공100걸겟습니다 ㅠ 부탁드려여 ㅎㅎ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내일이개학인데 지금 맨날놀기만하다가 벼락치기중이네여 ㅠㅠ 우리나라의위인10명에 대해 자세히좀알려주세여
감상평 2
1.이순신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 옥포대첩,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했다.
본관덕수자 여해. 시호 충무군사서울 건천동(現 인현동)《난중일기》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밑에서 두 번째로 백의종군하였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팔사품(통영 충렬사 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亂中日記)》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 충렬사
 2.세종대왕조선왕조 제4대 왕(재위 1418~1450). 젊고 인품이 고매한 학자들을 등용하여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조선의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등의 과학 기구를 제작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문화를 일으켰다.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쓰시마섬을 정벌하는 등 정치·경제·문화·국방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재위1418년 8월 ~ 1450년 2월태종(太宗)원경왕후(元敬王后)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대왕 동상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장헌[莊憲, 정식 명칭은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들로,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 14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418(태종 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의 나이에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아 즉위하였다. 태종은 이후 4년간 상왕으로 생존하여 어려운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즉위 뒤 정치·경제·국방·문화 등 다방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건국 초기의 강압적 왕권과 훈신세력 등이 사라지고, 온유한 유가적 자질의 신권과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의 만남으로 유교정치를 폈다.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허조(許稠) 등을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꾀하고, 전대부터 이룩된 6조 직계제를 통해 의정부(議政府)를 견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확립하였다. 나아가 집현전을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최항(崔恒) 등의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인재양성과 학문진흥을 꾀하였다. 그들에게는 특전을 주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주어 학문에 정진토록 하였으며, 정치 자문·왕실 교육·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1443년(세종 25) 정인지·최항·신숙주·박팽년·성삼문·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젊은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3년간의 검증 기간을 거쳐 1446년에 반포함으로써 우매한 백성들도 어려운 한자(漢子)에 의존하지 않고 쉽게 뜻을 전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입의 구조와 발성 원리를 연구하여 자음(17)과 모음(11)을 서로 교합하여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는 아주 새로운 표기법을 창제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소유하도록 하였다.
한편, 집현전에서 수많은 학술연구를 통하여 다양한 연구서적과 역사서(유교경서, 의례서, 문학서, 훈민정음 관계서, 지리서, 농서, 역사서, 법률, 천문 등)를 편찬토록 하였다. 나아가 경자자(庚子字,1420)·갑인자(甲寅字,1434))·병진자(丙辰字,1436) 등의 새로운 활자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가운데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이름난 활자이다. 이를 이용하여 여러 서적을 출간하여 출판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실록(實錄) 등 국가의 역사서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춘추관(春秋館)·충주(忠州) 외에 전주(全州)·성주(星州)를 포함하여 4대 사고(史庫)를 확립하였다. 세종대에는 집현전을 중심으로 학문연구가 활발하여, 다음과 같은 주요 도서들이 수찬, 간행되었다. 《고려사 高麗史》《속육전 續六典》《농사직설 農事直說》《시학절목 視學節目》《신찬팔도지리지 新撰八道地理志》《신찬경제속육전 新撰經濟續六典》《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방류취 醫方類聚》《칠정산내/외편 七政算內外篇》《동국정운 東國正韻》《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석보상절 釋譜祥節》《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銃筒謄錄》외 다수이다.   
통합하였다. 사찰을 정비하여 종단 각 18개 총 36 사찰만 인정하고, 사원전(寺院田), 상주승(常住僧), 사사노비(寺社奴婢) 등을 삭감 정리하였고, 도성 안에서의 경행(經行)이나 연등행사 등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말년에는 궁중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승과제도(僧科制度)와 경행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불교정책에는 전폐론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전통신앙을 소멸시키지는 않고, 부분적 억불책(抑佛策)을 써서 5교(五敎) 양종(兩宗:천태종·조계종)을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2종으로
음악(音樂)에도 관심을 기울여 1425년 관습도감(慣習都監)을 설치하고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아악기들이 제조되었으며, 편경과 편종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왕은 손수 <정대업 定大業> <보태평 保太平>을 직접 작곡하기도 하였다(현재 무형문화재 1호). 천문 역법 기상에도 큰 관심을 가졌고, 과학기술 면에서는 1442년 이천·장영실(蔣英實)로 하여금 우량(雨量)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欽敬閣)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게 하였고, 천체 관측기구 혼천의(渾天儀)·해시계(앙부일구)·물시계(자격루) 등을 발명 제작하게 하였다. 김담(金淡)·이순지(李純之) 등을 시켜 중국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 명(明)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回回曆)을 빌어 역서(曆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같은 지원을 바탕으로 이순지가 천문·역법(曆法)·의상(儀象) 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펴냈다.
경제·사회 면에서는 1436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고 각도(各道)의 토지를 비척(肥瘠)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稅率)을 달리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결함이 많아 14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풍흉(豊凶)에 따라 연분 9등법(年分九等法)과 토지의 비옥도(肥沃度)에 따라 전분 6등법(田分六等法)에 의한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하였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마다 측량하여 양안(量案)을 작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금속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의창(義倉)·의료제도·금부삼복법(禁府三覆法)을 제정하였고, 노비(奴婢)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하여 사형(私刑)을 금하도록 하였다. 대외정책 면에서는 주변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토확장에 진력하였다. 명나라에 보내던 금(金)·은(銀)의 조공물(朝貢物)을 폐지하고 마(馬)·포(布)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여진(女眞)과의 관계는 무력으로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전(和戰) 양면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六鎭)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1432).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崔潤德)·이천 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때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곳에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노력하였다. 일본과는, 조선초에도 여전히 변방을 노략질하는 왜구를 진압하기 위하여,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한 뒤(도주를 깨우침, 왜선 장악 및 소각, 도적의 집 소각, 처형, 곡식 베어냄, 포로 장악 등) 쓰시마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로부터 사죄받았다. 그리고 쓰시마섬은 원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하나 그곳이 바다 가운데 멀리 있어 강력하게 하지 않고 놓아두는 것이니 평화롭게 지내도록 타이르는 장지(長旨)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 후 그들의 생활환경이 아주 열악하여 통상을 간청해오자, 1426년 삼포(三浦)를 개항하였다. 그러나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14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卞孝文)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하게 하여 1년 동안에 입항할 수 있는 세견선(歲遣船)을 50척으로 제한하였고, 세사미두(歲賜米豆)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受圖書人)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그 밖에 단군사당 봉사, 삼국의 시조묘에 제사 등 민족의 역사와 그 뿌리를 소중히 하는 데까지 관심을 두었다. 당시 사대주의가 팽배한 시대배경을 갖고 있었으나, 외국 문화를 참조하면서도 민족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진력하여, 민족 역사상 가장 찬란한 한 시대를 열었다.  
광주(廣州)에 있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겼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陵西面) 왕대리(旺垈里)에 있는 영릉(英陵)인데, 처음에는
 3.장영실조선 전기 세종 때의 과학자.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었으며,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외 여러 과학적 도구를 제작 완성하였다.본관아산(牙山)과학《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조상은 원나라 소주, 항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에 귀화하여 아산군(牙山君)에 봉해졌던 장서(張壻)의 9대손이며 그의 집안은 고려때부터 대대로 과학기술분야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부친은 고려말 전서라는 직책을 지낸 장성휘이며 모친은 기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영실의 신분은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였다. 그의 과학적 재능으로 태종 때 이미 발탁되어 궁중기술자 업무에 종사하였다. 제련(製鍊) ·축성(築城)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으며 1421년(세종 3) 세종의 명으로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다. 1423년(세종 5) 왕의 특명으로 면천(免賤)되어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가 되면서 관노(官奴)의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행사직(行司直)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李狀)을 도와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天文儀)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세종 15) 정4품 호군(護軍)에 오르고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고 이듬해 동활자(銅活字)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의 주조를 지휘감독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1437년부터 6년 동안 천체관측용 대 ·소간의(大小簡儀),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天平)일구, 고정된 정남(定南)일구, 앙부(仰釜)일구, 주야(晝夜)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欽敬閣)의 옥루(玉漏)를 제작 완성하고 경상도 채방(採訪)별감이 되어 구리[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하였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上護軍)에 특진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세종이 신병치료차 이천으로 온천욕을 떠나는 길에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수레가 부서져 그 책임으로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당하였다. 세종은 곤장 100대의 형을 80대로 감해 주었을뿐이었다. 그뒤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혀남아있지 않다.   4.유관순만국이 평화를 주장하는 금일을 당하야 (…) 우리도 비록 규중에 생활하여 지식이 몽매하고 신체가 연약한 아녀자 무리나 국민 됨은 일반이요 양심은 한가지라 (…)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워할 것도 없도다. 살아서 독립기(獨立旗) 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괴(羞愧)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衷曲)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3․1운동 시기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중에서-   계몽운동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민족의식을 함양유관순(柳寬順) 선생은 1902년 11월 17일 충남 천안군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중권(柳重權), 모친은 이소제(李少梯)로 선생은 이들 사이의 5남매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선생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서 한말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興湖)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자였다. 이를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선생의 부친은 구국의 신념과 방도가 기독교에 있음을 깨닫고 유빈기(柳斌基), 조인원(趙仁元) 등 향촌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민중 계몽운동에 노력하고 있었다. 선생 또한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감리교에 입교하여 돈독한 신앙심을 키우는 한편, 부친의 훈도 아래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갔다. 특히 선생은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몸소 체험하면서 민족의 처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전후 처리 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민족이 이 기회에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계획되었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었고,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한국 민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므로, 3․1운동의 초기 단계는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와 학생들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선생의 생각은 종교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에서 발로된 것이었고, 양자가 서로 응축된 것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과 탄압도 이겨낼 신념이 굳건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8년 봄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매우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것은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 선진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의 주선으로 금세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복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선생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 않았다. 선생은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다짐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이 같은 조국애와 민족애는 곧 이어 봉기하여 전개된 3․1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학생들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의 발판 마련선생이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용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 가던 시기에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천도교 측은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을 중심으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 등 3대 원칙을 수립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 기독교 측에서도 신한청년당의 선우혁(鮮于爀)과 옛 신민회(新民會) 동지인 이승훈(李昇薰), 양전백(梁甸伯)이 모여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서울의 학생들 또한 보성전문의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의 김원벽(金元璧), 경성의전의 한위건(韓偉健)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 계획은 천도교 측의 연합 전선 형성 제안, 즉 교단과 종파를 아울러 민족 독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하나로 응집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민족대표의 선정, 거사일, 독립선언서 배포의 역할 분담, 불교계의 동참 등 3․1운동에 대한 중요한 합의가 도출되게 된다. 이화학당 시절, 뒷줄 오른쪽 끝이 유관순 열사.  3.1운동의 시작독자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으니 동참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회의를 열고 연합 전선에 참가하여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며, 형편에 따라서는 학생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국내의 3․1운동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나아가 민족대연합전선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18년 말 재일 조선유학생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한 유학생들은 최팔용(崔八鏞) 등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2․8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계백(宋繼白)을 밀사로 파견하여 거사 소식을 알림으로써 국내 독립운동 진영의 3․1운동 계획을 본격화시켜 갔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어 민족대표들의 협의를 거친 끝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2만 1천여 매가 인쇄되었다. 거사일자는 3월 3일의 광무황제 국장일과 3월 2일의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동일한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 동안의 경과를 정정당당히 밝힐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례를 올리기도 하였고,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본국에 통고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영사관 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 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학생 시위 결사대 조직, 만세 시위에 참가선생 또한 이 같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하여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하는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갔다. 이로써 선생은 마치 잔다르크처럼 구국의 화신으로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이자, 민족혁명운동인 3․1운동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3월 5일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는 선생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거의 전부와 광무 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만여 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부르짖는 시위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워 갔다. 선생 또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분출하며 항일 독립의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 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선생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우선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삼천리 강산이 들끓고 있는데 우리 동네만 잠잠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부친의 주선으로 감리교 동면 속회장인 조인원(趙仁元)과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하며 만세 시위운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워 나갔다. 그리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추진 총본부는 용두리 지렁이골(芝靈里)에, 중앙 연락기관은 장명리와 백전리에 두기로 하였다. 이 밖에도 천안장을 보러 다니는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의 각 면과 촌에도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유림의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확보하도록 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유관순 열사의 연설로 더욱 고취된 만세 운동의 열기거사를 앞둔 3월 31일 선생은 지령리 매봉에서 내일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다. 그러자 선생과 연락이 닿았던 다른 여러 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함으로써 서로 성공적인 거사를 기약하였다. 드디어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정오가 되자 군중 앞에서,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놈들은 우리 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라고 열변을 토해냈다. 선생의 이러한 연설은 군중들의 애국심을 한층 고조시켜 장터는 이들이 내뿜는 독립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 올랐다. 이어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선생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던 조인원이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약식의 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이다. 그런 다음 선생을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시위 중 부친과 모친을 눈 앞에서 모두 잃어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의 부친인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 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숙부인 유중무(柳重武)와 조인원, 조병호(趙炳鎬) 부자, 김용이(金用伊)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 감옥 수형자 기록표 사진.
유중무는 격분하여 주재소에서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 매려 하였고, 또 제지하는 헌병 보조원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 십 년이나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윽박질렀다. 선생 또한 고야마(小山)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독립운육동의 정당성을 밝혔다. 김용이는 주재소의 헌병 보조원들에게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들은 헌병들이 강탈했던 태극기를 도로 빼앗아 휘두르며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함께 죽이라”고 소리치며, “구금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주재소를 습격할 태세를 보였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그 날 저녁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열 여덟 꽃다운 나이에 옥중 순국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공주감옥에서 선생은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온 오빠 유관옥(柳寬玉)을 만나게 되었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로 부모를 잃고, 오빠까지 감옥에서 만나게 된 선생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게 된 선생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이에 따라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선생은 여기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여 갔다. 선생은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 3년을 받게 됨에 따라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1일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선생은 서대문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년 10월 12일,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서울복심법원 판결문.약력5.안중근[상세내용]<?xml version="1.0" encoding="UTF-8"?>안중근(安重根)에 대하여1879년(고종 16)∼1910년. 한말의 교육가·의병장·의사(義士).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1. 가계와 성장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인수, 아버지 진사 태훈(泰勳, 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응칠(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중에도 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여 자가 되었다.
읽었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류(史記類)를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하여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고종 31)에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수렵자)을 조직하여 동학군의 진압에 나서자 이에 참가하였다. 다음해에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아서 많은 일을 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稧: 1,000명 이상이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뒤로 교회의 신자들과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2. 교육활동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지면이 있는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국내에서 교육 등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 다음해에 귀국하였다.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였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하여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정리한 뒤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반일운동을 행동화하기 시작하였다.3. 북간도 망명과 독립운동이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한 뒤 약 3, 4개월 뒤에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하여 비밀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5천여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처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천신만고로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이범석(李範奭) 등 애국지사를 만났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4. 비밀결사 단지회 조직1909년 3월 2일에는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서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5. 이토 암살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 遠東報》와 《대동공보 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하여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하여 만주에 오게 됨을 알게 되었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連後)·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에 대한 중대모의를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에 도착,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려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6. 법정에서의 태도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힌 다음 거사 동기를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는데 안중근은 일반살인피고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국내외에서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재판과정에서의 그의 태도와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내심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선변호인 미즈노는 검찰관에 대한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언도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는데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定根)·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된 행동의 인간상으로서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6.김구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본관안동백범창수아명 창암, 법명 원종, 초호 연하독립운동황해도 해주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백범일지(白凡逸志)》↑ 백범김구선생 동상 /본문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였으나 구(九)로 개명,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의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감형으로 1915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출처] 김구 [金九 ] | 네이버 백과사전 7.방정환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인 아동문학가.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 등의 창간을 비롯 잡지를 편집·발간했다. 창작뿐 아니라 번역 ·번안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하였다.호소파(小波)문학서울《소파전집》(1940), 《소파 동화독본》 등↑ 소파 방정환 선생 묘역 /본문호는 소파(小波)이며 서울 출생이다.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17세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했다가 곧 사직하였다. 이후 천도교청년회, 개벽사, 천도교소년회 등과 관련을 맺었다. 1917년 손병희의 딸 용희와 결혼하여 손병희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면서 어린이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이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입학했다. 1920년 일본 도쿄의 도요[東洋]대학에서 철학과에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했다. 1921년 서울로 돌아와 천도교소년회를 만들고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강연을 했다. 또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켰으며, 어린이 동화집도 냈다.
《어린이》(1923)를 창간하고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여 그 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했다. 또한 《신청년(新靑年)》 《신여성(新女性)》 《학생(學生)》 등의 잡지를 편집 ·발간하기도 했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그는 동화구연대회, 소년문제 강연회, 아동예술 강습회, 소년지도자대회 등을 주재하여 계몽운동과 아동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창작동화뿐만 아니라 많은 번역 ·번안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하였다.
저서로는 《사랑의 선물》과 사후에 발간된 《소파전집(小波全集)》(박문출판사, 1940), 《소파동화독본》(조선아동문학협회,1947), 《방정환아동문학독본》(을유문화사, 1962), 《칠칠단의 비밀》(글벗집, 1962), 《동생을 찾으러》(글벗집, 1962), 《소파아동문학전집》(문천사, 1974) 등이 있다. 한편 1957년 새싹회에서는 '소파상(小波賞)'을 제정하여 해마다 수여하고 있다.
[출처] 방정환 [方定煥 ] | 네이버 백과사전 8.강감찬고려시대의 명장.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달아나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였다.본관금주초명 은천, 추충협모안국공신《낙도교거집》 《구선집》 등↑ 낙성대 강감찬장군 동상 /본관 금주(衿州:서울 관악구 봉천동), 초명 은천(殷川).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朝臣)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  9.장보고 신라의 무장.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려고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40년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별칭일명 궁복·궁파군사↑ 장보고 초상화 /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신라의 무장.본문다른 이름은 궁복(弓福)·궁파(弓巴)이다.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君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했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 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837년(희강왕 3)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祐徵:神武王)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진해장군(鎭海將軍)이 되었다. 840년(문성왕 2)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845년(문성왕 7)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보내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846년(문성왕 8) 그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10.광개토 대왕고구려 19대 왕(재위 391∼412).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한국 최초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동예를 통합하고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재위391년∼412년이름 담덕(談德)고구려정치↑ 5세기 고구려의 영토 확장 /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한 광개토대왕의 적극적인 영토확장과 뒤이은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고구려는 대외적 팽창을 거듭하게 되고 5세기 경 동북 아시아의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이름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로서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으로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위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는데, '영락(永樂)'은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91년 고국양왕 사후에 즉위하였다. 즉위 초부터 대방(帶方)을 탈환하고자 백제의 북쪽을 공격하여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396년(광개토왕 6)에는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시켰으며, 동예(東濊)를 통합하고(410), 신라와는 하슬라(何瑟羅)를 경계로 삼았다. 또 연(燕)나라의 모용희(慕容熙)를 반격하여 신성(新城)·남소(南蘇)의 2성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고, 405∼406년 후연(後燕)의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407년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高雲)과는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능은 소재 미상이나 414년 장수왕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건립한 광개토대왕릉비에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대왕 연표]
391년 광개토대왕 즉위392년
10성 함락,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백제 공격하여
 거란을 정벌하여 500여 명을 포로로 함393년 백제가 침입하자 이를 격퇴,
 평양에 9사(寺) 창건하여 불교 장려함394년
 백제와 수곡성(水谷城) 아래에서 싸워 승리,
 남쪽에 7성을 쌓음395년 백제와 패수(浿水)에서 싸워 승리, 비려(碑麗) 정벌396년 백제 공격하여 58성 차지,
동생과 대신을 인질로 잡아 옴397년 후연의 요동성을 점령함398년 숙신을 정벌함399년 백제· 왜 연합군 신라 칩입, 고화질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백제 아신왕의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 요청400년 백제·가야·왜 연합군 격파402년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침403년 후연을 공격함404년 대방(帶方)에 침입한 백제·왜 연합군을 전멸함405년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한 후연의 모용희 군대를 격퇴406년
 목저성(木抵城)을 공격한 후연의 모용희 군대를 격퇴410년 동부여를 통합함412년
 광개토대왕 죽음[출처]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 | 네이버 백과사전  이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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